9월 14일 예술공간 서울 4시 공연.

나비잠, 블랙박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이 순서로 보았는데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약칭 '늑대')'까지 보고 나니 재밌게도 집필시기와 역순으로 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 재밌는 건 개인적으로 나중에 본 작품일수록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나비잠의 경우, 인형 오브제의 활용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지만 대사가 귀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없었고, 시에서 아포리즘을 빼와 연극에 이식시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연기도 어설펐다. 무대에 연극이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3만원이나 되는 연극의 배우들의 연기가 완숙될 때쯤 관객이 재관람하길 바라는 건 작가주의를 넘어 관객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것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연습기간이 모자랐다거나 내부 사정이 있었겠지만 어색한 연기는 참아주기 힘들었다.

블랙박스 역시 대사를 현학적이라 수식해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김경주의 이전 시집들에서 읽었던 익숙한 문장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 그럭저럭 대사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오히려 시를 연극의 리듬으로 읽었을 때 발생되는 효과를 어렴풋이 체감할 수 있었다. 대사의 합이 뻔하게 흐르지 않고, 통통 어디로 튈 줄 모르는 탱탱볼 같이 변칙적이여서 긴장감을 유발했고, 블랙코미디의 감성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아이러니를 발생시켜 지성과 감성이 동시에 자극되는 풍요로운 말의 잔치였다. 그런데 중간에 살짝 졸아서 그런지 줄거리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나중에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에 수록된 텍스트로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무엇보다 1시간의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 좀 허접하게 비유한다면 딱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들 정도로, 거북함이 들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선에서 끊었을 때의 상쾌함이랄까, 충만함이랄까 그런 걸 느꼈다. 늘어지는 느낌 없이.

약간의 홍보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줄거리 설명을 하고자 한다.

한반도의 삼면을 바다가 두르고 있듯 이 무대의 삼면은 커튼으로 둘러처져 있다. 조명 아래 섬처럼 떨어져 있는 7개의 의자들. 죄수복을 연상시키는 칙칙한 무채색의 옷을 입은 7명의 남녀가 의자에 앉는다. 여자 1이 말한다. 선생님, 왜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나요. 이들은 사회에서 이런 이름으로 불릴 지 모르겠다. 왕따, 찌질이, 찡찡이, 패배자, 실패자, 루저, 을. 늑대는 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은유이다. 인간들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한 늑대처럼 이들은 총/권력을 쥔 이들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변두리에 밀려나 허공에 대고 하소연할 뿐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은 대신 야성을 거세당한 (늑대였던) 개처럼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회의 요구조건을 맞추기 위해 토익시험/토익스피킹시험/토플시험/HSK시험/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어능력시험/컴퓨터활용능력시험 등을 볼 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일반/평균'의 바운더리에서 쫓겨나 경쟁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삶과 경쟁하게 될 지도 모른다. 종종 이불 속에서 혼자 숨죽여 우는 날이 있을 지도 모른다. 늑대처럼 달빛 아래 독야청청 서서 울 수도 없는, 외로움일랑 고독일랑 잊어야 하는, '달동네'의 돌멩이들. 하늘에 떠 있기라도 하면 누군가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아름답게 빛난다고 칭찬도 해줄 지도 모르겠는데 이 지구별에서 그들은 돌멩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갑고, 딱딱한, 것ding

이것은 기형에 관한 이야기다, 라고 시인은 언제 쓴 적이 있지 않았던가. 완전무결한 형상을 지닌 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기형이다. 신의 이데아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정상'을 만들고, '비정상'을 몰아내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정상을 세우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기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가상의 중심/정상을 설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차이의 존재자가 된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자들의 보편성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독. 하이데거는 고독을 근본기분이라 설명했다. 그러니까 고독을 존재의 양식으로 삼은 존재자에게 차이는 더 이상 공포와 불안의 근거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두 팔이 잘린 늑대만 무대에 남는다. '두 팔이 잘린' 설정을 보고 이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외계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극에서 이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의 출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늑대를 임신했을 당시 먹은 뱀이 잉태하고 있던 뱀새끼가 그의 양팔을 먹어치웠다는 이야기... 뱀은 원형적 무의식을 담고 있는 상징적 기표다. a.k.a 에덴 동산 이야기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는 맹독을 품고 있는 위험한 존재이기에 이런 상징화 작업이 필요했겠지만 나는 다른 지점에 시선이 머문다. 뱀은 손/발/다리가 없다. 자연계에 손과 발이 없는 동물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보자. 동물보다 하급하다고 하는 곤충들도 다리가 있고(때론 너무 많아서 혐오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뱀과 같은 파충류 중에서도 다리가 없는 동물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음... 달팽이 정도를 제외하곤 다리가 없는 '무지'한 동물이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다리 없음'은 자연계에서 매우 희귀한 특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뱀은 온몸을 대지에 붙여야 한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뱀을 찬양하고, 김근은 바닥에 붙은 온몸을 질질 끌고 나가야 하는 뱀소년/인간을 담담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리얼리즘과 그로테스크. 공포는 환상fantasy가 아니라 실재the real다.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현실 앞에 우리는 그 동안 현실이라 믿었던, 믿고 싶었던 무엇이 위생주의에 의해 관리된 허상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가 살 만한 곳이라는 것, 지옥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루머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연극의 언어는 사회비판의 날 선 언어가 아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상처 입은 이들끼리 상처를 드러내보임으로써 상처가 상처에 머물지만은 않게 하는 언어, 상처를 현시하는 언어의 윤리로 상처를 보듬는 언어,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자장가 같은, 언어. 처음 김경주의 시집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그의 좋은 시들은 읽을 때면 꿈꾸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시인의 시적 몽상 - '불가능한 감수성' 내게 상투적으로, 경을 읽는 것 같이 느껴졌던 서정의 껍질을 벗기고 벗겨 '맨 살'로 느낄 수 느껴지는 언어. 무수한 겹을 품고 있어 어느 지점에 오롯이 머물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우주를 헤엄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언어, 어느 에세이(혹은 인터뷰)에서 '나의 직업은 언어입니다'라고 했던 그 언어.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낯섦에서 오는 폭발력은 많이 죽어 있었지만 오히려 단어의 결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다르게 그의 언어를 맛볼 수 있었다. 연극과 동명의 시를 이쯤에서 한 번 감상해보자.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다 가는 것이다

한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은걸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다 나르는데

우리는 30년 동안 침을 흘렸다 그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단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리는걸요

길 위에 피를 흘리고 다니지 마라

사람들은 네 피를 보고 발소리를 더 죽일 거다

알아요 이제 저는 불빛을 보고도 달려들지 않는걸요

자기 이빨 부딪치는 소리에 잠이 깨는 짐승은

너뿐이 아니란다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육아일기를 출간한 적이 있는 시인은 뱃 속의 태아를 '우주'라 명명한다. 아니 실은 본래 이름을 '기억'해준 건지도 모른다. 연극이 끝나고 대학로 알라딘 중고매점까지 가기까지 연극제목이 마음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머무르는 잔상 혹은 시차적 그을음. 늑.대.는.눈.알.부.터.자.란.다. 문득 이누야사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요괴의 이미지처럼 해부학 교실에 유리병에 담겨 있는 눈알이 떠오르기도 했고, 과학 교과서에서 봤던 태아의 성장과정이 흐릿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48억 년 지구... 산소, 물... 빙하기/간빙기... 시아노박테리아... 아메바... 짚신벌레... 유성생식... ... ...

아, 아득하다. 오, 오묘하다. 어, 어지럽다. 이, 이상하다. 우, 우울하다

주저흔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물 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 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져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서로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메모했던 문장 몇 개(정확하지 않음) : 아버지들은 박제에 불과해. 위엄만 있을 뿐이지. / 동화는 어른들이 꾸는 악몽이다 / 울음소리는 이쪽의 불구가 저쪽의 불구를 부르는 소리다. 엄마 우리는 피를 나눈 게 아니라 울음소리를 나눠가졌나봐요/ 가족은 같은 곳에 똥을 싸면서 사는 존재들이지/ 그런 여자는 너 같은 병신을 사랑하지 않아

사실 결말이 조금 아쉬웠다. 혹은 내가 좀 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면 마지막 늑대의 울음소리에서 푼크툼을 포착했을 지도 모르겠다. 감정/서정은 아직 내게 너무 멀고 낯선 세계이지만 김경주의 시세계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벽이 지금보다 훨씬 두터웠을 것이다. 근작 시집 <고래와 수증기>를 보니 작법이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사실 <시차의 눈을 달랜다>까지 읽으면서 아포리즘이 버겁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다. 다섯 번째 시집이 기다려진다. 네 번째 연극도 좋고!

p.s [기형. 모성. 울음소리. 바람]

이렇게 퍼즐조각은 다 모인 것 같다. 내 마음의 무늬를 만드는 언어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고 싶은 밤이다.

박찬국 배우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배우고 싶다. 휘파람으로 교향곡을 불렀다는 비트겐슈타인(들어본 적 없지만) 못지 않은 명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