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시즌 http://blog.naver.com/theatergoing_people/220496974330

"주인공은 하마야. 실험실에서 태어난 아기하마지. 어릴 때부터 엄마하마에게서 격리 당해 인간들 사이에서 자라고, 인간의 지적 교육을 받고, 인간의 기억을 주입 당해 지성을 가지게 된 진이는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생각해. 단지 직립이 어렵고 손가락을 사용하기 어려워 몸이 조금 불편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자, 이제 진이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주어져. 사고를 따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몸을 따라 하마로서 사는 것. 진이의 입장에서 생각 해 볼까?"

돌연히 멈춤

장소: 노을소극장

기간: 2015/10/1-18

출연: 성여진, 전중용, 우미화, 이갑선, 안창환, 이승헌, 강해진

연출: 김수희

제작: 극단 미인

1. 돌연히 멈춤

E: 어려워. 불친절해.

W: 뭐가? 연극이?

E: 응. 우리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짜잔! 하고 너무 대놓고 말해주는 극도 별로지만, 이렇게 숨기고 숨기고 숨겨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는 극도 그다지 편안하진 않아. 각종 주제가 이것 저것 너무 많이 버무려지다 보니 전체적으로 봤을 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기 어려워진 느낌이라고 할까.

W: 마음대로 해석하라는 거 아냐? 어차피 의미는 관객에게 가 닿을 때 생기는 거라며.

E: 그래, 이렇게 던진다는 건 내 마음대로 해석하라는 거겠지. 머리가 좀 복잡하긴 하지만 호/불호로 나누라면 좋았어.

W: 그런데, 음…… 하마가 나오는 극이라고?

E: 음…… 응. 하마가 주인공이야.

W: 음…… 그렇구나.

E: 자연 상태의 야생 암컷 하마가 납치돼. 그리고 하마는 임신을 하게 되고, 아기하마는 태아 시절부터 과학자들의 실험 대상으로 이용되지.

W: 어떤 실험인데?

E: 어…… 인간의 기억을 주입시키는 실험이야.

W: 인간의 기억을…… 하마한테?

E: 어어…….

W: …….

E: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데, 하마 역을 사람들이 연기했고, 그런데 잘 했고, 물론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하마도 있었지만 실제로 엄마하마의 경우 진한 모성애를 보여줬어. 그녀의 모성애는 실제로 감동적이었다고.

W: 어어.

2. 인간인 하마

E: 주인공은 하마야. 이름은 진이고. 실험실에서 태어난 아기하마지. 어릴 때부터 엄마하마에게서 격리 당해 인간들 사이에서 자라고, 인간의 지적 교육을 받고, 인간의 기억을 주입 당해 지성을 가지게 된 진이는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생각해. 단지 직립이 어렵고 손가락을 사용하기 어려워 몸이 조금 불편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W: 오오. 정말 인간적인 수준의 지성을 가진 거야?

E: 인간적인 수준? 정확히 그게 뭘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것 같긴 하다만…… 내 개인적인 상식 선에서 생각했을 때 진이는 웬만한 사람 이상의 지성을 갖췄어. 철학적인 사고가 가능한 하마야.

W: 잘 나가다가도 하마란 말만 나오면 개그가 된다.

E: 어쩔 수 없어. 정말 지적인 하마라니까. 그의 정신세계는, 단언컨대, 인간이야. 그것도 굉장히 지적인 인간.

W: 혼란스러워하진 않아?

E: 처음에는 그저 인간으로서의 자신만 인식하다가, 문득 아기하마였을 때 엄마하마의 기억이 나.

W: 아기 때부터 사람들에 의해 길러졌다며?

E: 어, 그러니까…… 상애기 하마 때. 갓난아기 하마 때.

W: 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 자식, 굉장히 많이 웃네. 실제로 보면 최소한 하마를 볼 때 웃음이 나오진 않을걸. 여기서 가장 인간적인 게 엄마하마랑 진이니까.

W: 그래 그래. 계속 얘기 해 봐. 진이가 엄마하마의 기억을 떠올렸다고?

E: 그래. 어릴 때 엄마하마가 자기를 두고 슬퍼하던 게 기억나는 거야. 좋은 풀과 나쁜 풀을 구분하는 방법도 알려줘야 하고, 수영 하는 방법도, 물고기를 잡는 방법도 알려줘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아무 것도 알려줄 수가 없다고…… 그럼 이 아기하마는 살아남을 수가 없을 텐데 어떡하면 좋냐고.

그리고 진이는 혼란스러워 해. 분명히 자신은 인간인데 하마로서의 기억이 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인간인지 하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명확한 것은 있었어.

W: 그래, 인간인 하마가 원하는 게 뭔데?

E: 사랑 받고 싶다는 거. 행복해지고 싶다는 거.

W: …….

E: 하마 이야기를 한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멈췄네. 자신이 인간인지 하마인지 알 수 없는 진이는 어느 쪽이든 그저 사랑 받고, 행복해지고 싶었어. 그가 원했던 것은 그거야.

하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을 인간으로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인간으로서 행복해지길 바랐지. 잘 펴 지지 않는 손가락도 고치고, 어서 빨리 직립을 해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 싶어했어.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은 조금씩 변해.

W: 왜?

E: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첫 번째는, 인간들을 제대로 봤기 때문이야. 타인의 니즈는 완벽하게 무시한 채 독선적인 바람으로 비인간적인 실험을 행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을. 치졸했지.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열등감을 지닌 그 모습들. 웬만한 인간들보다 똑똑한 하마인 진이는 ‘인간성’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겠지. 어쨌든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과 달리, 그에게는 옵션이 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자기 자신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야.

W: 직시한다고? 자기 자신을?

E: 응. 하마로서의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돼. 그 전까지 그는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어. 당연히 인간의 모습이 정상적인 것이며, 자기 자신은 일종의 돌연변이로 바라보게 되었겠지. 하지만 진이는 진짜 가족을 만나게 돼. 인간들 사이의 파워게임, 혹은 정치 쇼의 일환으로 성사된 만남이었지만 어쨌든 만난 건 만난 거니까.

진이의 엄마하마는 단번에 진이를 알아봐. 그리고 진이는 당연히 어머니를 부정하지. 그는 인간이니까. 그런 진이에게 엄마하마는 직접 촉각으로 가르쳐 줘. 네 단단한 몸을 보라고. 넌 강인한 신체를 지닌 하마라고. 물론 진이는 부정하지만, 똑똑한 그에게 ‘몸’이라는 것의 발견은 큰 의미로 다가왔을 거야.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몸을 부정하기만 해 왔어. 손가락이 없는 손, 직립할 수 없는 신체 구조. 무언가 결핍된 것으로만 생각하던 자신의 몸에서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겠지.

3. 인간이냐, 하마냐, 그것이 문제로다

E: 자, 이제 진이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주어져. 사고를 따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몸을 따라 하마로서 사는 것. 진이의 입장에서 생각 해 볼까?

먼저, 그가 계속 사고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인간으로서 산다고 해 보자. 일단 그는 외로울 거야. 왜냐면, 혼자니까. 세상에 그와 같은 존재는 단 하나뿐이야. 인간은 모두 그를 하마로서 인식할 거고, 하마들과는 지적 교감을 할 수가 없어. 또한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결핍에 시달려야 하지. 왜냐하면 자신의 몸은 하마니까.

몸에 충실함으로써 하마로서 살 경우를 생각 해 볼까? 일단 편해. 생각이라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돼. 최소한 괴롭진 않겠지. 스스로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결핍에서 비롯된 열등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어. 무엇보다 설명하기 좋지. 모두에게. 인간에게든, 하마에게든.

너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 같아?

W: 글쎄. ……그런데, 그게 가능해?

E: 뭐가?

W: 하마로서 사는 것 말이야. 진이는 이미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버린 하마라며. 그의 정신은 이미 인간이나 다름 없다며. 아니, 웬만한 인간보다 뛰어나다며. 그런 그가 갑자기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하마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E: 그러게. 조금 더 단순화해서 생각 해 보자. 그의 껍데기를 차치하고, 정신적인 부분만 놓고 보았을 때, 진이는 사람이야. 굉장히 특이한 사람. 그치?

W: 그렇지. 자신의 특이성 때문에 사회에 섞여들 수 없는,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지.

E: 그런 사람 역시도 행복해지길 바라지. 사랑 받기를 원하고.

W: 그렇지. 본인이 무엇인지 헷갈리는 상황에서조차 사랑 받기를, 행복하기를 원했었다며.

E: 그런 인간에게 남겨진 옵션은, 인간으로서 계속 사고하면서 괴로워하든지, 아니면 ‘인간으로서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몸에 충실하게 하루하루 살아나가든지, 둘뿐인 거네.

W: ……그렇네. 그런데 두 번째 옵션, 생각을 멈추고 그저 몸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건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을지 불투명한 거고.

E: 찝찝한 결론인데.

W: 비약이야. 진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마잖아.

E: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