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아리랑>

- 주제의식에 매몰된 이야기 -

모든 반도는 그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반도 국가는 영원한 약소국일 수밖에 없고, 반도 민족은 영원한 약소민족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반도 국가의 슬픈 운명이고, 반도 민족의 비극적 숙명이다. 우리 한반도라고 예외일 리 없다.

- 『아리랑』 원작자 조정래 -

조정래 선생의 말처럼, 우리 한반도는 5천 년 역사 속에서 천 번에 이르는 크고 작은 침략을 당해왔다. 이러한 크고 작은 침략들에 관한 역사가 국사 교과서 내용의 주를 차지할 정도로 말이다. 국내 근대사 역시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으로 시작했고, (실학 등 새로운 학문이 발전한 17~18세기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도 있으나, 왜란과 호란과 같은 전란에 휩싸였던 이 시대 또한 어디 평안했던가?) 1945년 현대사의 시작과 더불어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정말이지 반도 민족의 비극적 숙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비극적 역사는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소재의 빈곤’이라는 슬픈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6.25 전쟁 이후로도 우리 민족의 수난은 급격한 성장 통을 겪느라 지속되어 왔으니, 과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민족의 한과 서러움, 아픔 외에는 이야기 할 것이 별로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많은 예술 작품은 그것이 영화든 문학작품이든 소재의 빈곤함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소재에 대한 빈곤이 이유였을까, 혹은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을까. 우리는 ‘우리민족’의 아픔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참으로 많이 보아왔다. <박열>, <대립군>, <군함도>, <택시 운전사> 등 지난 몇 달간 상영관에 걸린 영화들만 보더라도, 시대만 약간 씩 다를 뿐 작품의 중심에는 비극적 역사가 있었다. 분명 다른 작품임에도 묘한 기시감을 떨쳐낼 수 없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슷한 소재가 스크린과 무대에서 반복되는 아쉬움은 차치하더라도, 이렇듯 반복되는 소재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까닭은 작품의 완성도에 있다. 그동안 민족의 아픔을 소재로 삼았던 작품들 중 다수는, 영화 <군함도>와 같이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상업주의로 점철된 이야기만 있었다든지, 혹은 주제의식이 과잉되다 못해 흘러넘쳐 정작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았다든지 하는 식의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래나 저래나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작품의 낮은 완성도일 뿐이었다. 뮤지컬 <아리랑>의 재연 소식에 반가움보다는 우려가 앞섰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주제의식에 매몰된 이야기

뮤지컬 <아리랑>은 조정래의 원작소설 『아리랑』을 각색하여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아리랑>의 각색 방향은 이른바 ‘선택과 집중’ 이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 <아리랑>은 총 12권에 달하는 분량, 백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을 자랑하는 복잡하고도 방대한 원작 소설을, ‘송수익’, ‘양치성’, ‘방수국’, ‘차옥비’, ‘차득보’ 등 주요 인물 7명으로 압축하여 풀어냈기 때문이다. 원작의 많은 부분을 선보이려는 욕심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아리랑>, 일단 겉보기에는 현명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아리랑>은 꽤나 버겁다. 12권의 소설 중 일부만을 추리고 추렸더라도,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무대에 올라가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많은 탓이다. 게다가 노래도 불러야 하고, 춤도 춰야하지 않는 뮤지컬이란 장르에서는 더더욱 상황이 여의치 않다.

뮤지컬 <아리랑>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느라 꽤나 버거워 보인다는 것은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데, 대표적으로 <아리랑>의 첫 넘버 ‘진달래와 사랑’이 그렇다. 등장인물을 한명씩 차례차례 소개할 여유가 없는 뮤지컬 <아리랑>은 첫 장면에서부터 모든 등장인물을 무대로 불러오며 인물들 간의 관계를 정리한다. ‘송수익’과 ‘차옥비’의 사랑, ‘차득보’와 ‘방수국’의 사랑, ‘수국이’를 짝사랑하는 ‘양치성’, 노동자로 해외로 간 ‘감골댁’의 아들 ‘영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계들이 ‘진달래와 사랑’ 넘버 하나에 모두 담기는 것이다. ‘아의 아리아’ 넘버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 넘버 하나에 원수의 아이를 가진 ‘수국이’의 분노와, 그녀를 지키지 못한 ‘득보’의 화, 항일 운동에 여념이 없는 ‘수익’의 한(恨이) 함축되는데, 이 넘버는 심지어 대사도 없다.

한꺼번에 관계를 정리하려는 시도는, 인물들 간의 명확한 관계 정립의 실패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첫 넘버에서 정리해주는 기억에만 의존하여 극의 흐름을 쫓아가야 하는데, 명확하게 관계를 파악할 즈음이면 극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서사 진행 역시도 <아리랑>의 문제점과 맥을 함께 한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들만큼이나 많은 이야기 또한 성급히 무대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올 때, 이는 도리어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각인이 되기가 힘들 터.

1,2막의 시작 전 영상을 통해 시놉시스를 훑어주는 것을 보아하니, 뮤지컬 <아리랑> 역시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시놉시스란 작품의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이다. 막이 올랐을 때 관객들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응당 시놉시스에서 발전되고, 이보다 더 세밀하게 짜인 이야기여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리랑>의 이야기는 관객들이 막이 오르기 전 스크린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전부다. 시놉시스로 작품의 전체 줄거리를 ‘퉁쳐버리는’ 아찔한 상황이 자아지고 마는 것이다. 각 막의 시작 전 영상을 보며 “이보다 무언가 발전된 이야기가 있겠지.”라는 기대는, 1막에서 금이 가고 2막에서는 와장창 깨져버리고 만다.

작품이 별달리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빠른 전개로 흘러가는 많은 이야기들을 서로 연결 짓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를 위해 노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민족의 아픔’이라는 주제의식이 이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퉁쳐진’ 이야기에 이외에, 무대를 가득 메우는 것은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등장인물들은 작품 내내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착취당한다. 여성 캐릭터들 역시도 원치 않는 성적 관계를 맺게 되고,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아들까지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슴 아픈 장면들은 뮤지컬 <아리랑>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기존의 알고 있던, 굳이 <아리랑>을 관람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야기는 1,2 막의 시작 때의 줄거리 요약으로 ‘퉁쳐지고’, 우리가 얼마나 아팠는지에 대한 재현만 이루어지는 이 모습. 앞서 언급한 주제의식에 매몰된 이야기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작품이 ‘아리랑’을 활용하는 방식 또한 기존의 비슷한 종류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아픈 한국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작품의 제목처럼 ‘아리랑’이다. 우리 민족의 한을 표출하는 노래, 또한 즐거울 때도 부르는 노래, 이미 <귀향>등 많은 작품에서도 등장하던 그 ‘아리랑’ 말이다.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 역시도 ‘아리랑’인데, 서른 명이 넘는 인물들이 모두 무대로 올라와 ‘아리랑’을 노래하는 모습은 민족혼의 ‘고취’라기보다는 차라리 민족혼의 ‘도취’에 가까워 보인다.

집단화된 기억과 철저한 이분법적 시선

얼마나 우리 민족이 일제에 의해 아파야 했는지, 또한 당시 일본이 우리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를 조명하기 위해, 일본인과 한국인은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조명된다. 이 작품에서 일본과 한국, 일본인과 한국인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 가학과 피학, 악과 선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양치성’이란 인물은 이렇듯 작품의 이분법적 시선을 여실히 방증하는 캐릭터이다. 악인으로서 작품의 많은 갈등들의 중심에 있는 ‘양치성’은 마지막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이용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우리 민족으로 그려진다. 나쁜 것은 그를 악인으로 몰아넣고 그를 이용하는 일제일 뿐인 것이다. “내가 야박하다고? 세상이 야박하지 내가 야박해?”라는 ‘감골댁’의 대사에서 또한 작품의 이분법적 시선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가 야박하다고 말하는 세상 역시도 결국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다.

작품 내내 일제는 절대 악일뿐 아니라 희화화되기에 이른다. 천황폐하 만세(반자이!)는 경박스럽게 외쳐지고, 한국인들을 조롱하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국가에 대한 결의나 충성 등의 진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작품의 목적은 아팠던 우리 민족의 과거를 부각하기 위해 당시 일제의 이미지를 절대적 악으로 불러옴으로써, 이를 비판하고 희화화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일본군 역의 앙상블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인채로 “스미마셍!”을 외치는 커튼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일본인도 아니고, 당시의 가해자는 더더욱 아닌 한국인 배우가 “스미마셍”을 외쳐야 하는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한국인들 역시도 획일적으로 묘사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결국 각각의 개인이라기보다는 당시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민족의 초상이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로 수렴되는 등장인물들의 한을 표출하기 위해서인지, 넘버는 매 곡이 끝날 때마다 울부짖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경사진 무대 또한 모든 이들의 고통을 빠짐없이 조명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하다. 민들레 홀씨를 연상케 하는 영상 또한 ‘민초들이 지킨 나라’,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데, 영상의 만듦새가 그리 좋지 않아 영상이 등장할 때마다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지고 만다.

당시 일제의 악행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잉된 주제의식을 몸소 체감하며, 또 무대에서 “스미마셍!”을 외치는 일본군 역의 앙상블들을 보면 통쾌함보다는 찝찝함을 느껴졌다면, 이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는 아마도 바로 집단화된 기억이 내포하는 폭력성 때문일 것이다. 몇 해 전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했을 당시, 상영을 기다리던 필자에게 한 할머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요즘 애들은 얼마나 편해. 전쟁을 겪어봤어, 해외에 광부나 간호사로 파견된 적이 있어? 요즘 애들은 세상 참 편해진 줄 알아야해.” 그녀가 전쟁을 겪거나 해외로 파견된 적이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와 같이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개개인의 경험이란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공동체에 공유되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아픔이란 사실 온전히 한 개인의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한 세대, 한 시대의 아픔이 획일적인 형태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아픔과 같은 집단화된 기억이란 결국 구체성이 결여된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획일적인 기억들은 국가라는 공동체에 묶여 공유되기에 이르고, 때로는 이처럼 도덕적 판단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이렇듯 구체성이 결여된 기억을 활용하는 것은 꽤나 위험한 결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수반한다. 결여된 구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이는 결국 맹목적인 비난과 비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모두 나쁘다거나 젊은이들은 옛날에 비하면 참으로 편하게 산다거나 하는 식의 배제와 배척처럼 말이다. 당시 일본인들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 역시, 이렇듯 결여된 구체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인간의 이해에 관한 예술

이렇듯 굳어진 이분법적 시선에서 출발하는 많은 작품들은 일종의 하나의 신화(Myth, 여기서의 신화는 바르트가 사용한 개념에 가깝다)로서 자리하기 시작한다. 집단의 기억 속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감히 의문을 제기해서는 곤란한 불가침의 영역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발전되지 못한 많은 작품들은 결국 악인은 항상 벌을 받게 된다거나 하는 식의 유치하고 뻔한 동화적 수준에서 머물게 된다. 이야기란 시대정신의 반영인 셈이니, 실제 관계들에 대한 담론,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에 대한 담론들 또한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반일’이라는 증오와 반감이 ‘혐한’이라는 또 다른 증오와 반감들을 낳았듯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작품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어보자. 당시 일제의 악행은 쉽게 용서받을 수 없으며 우리나라가 일제에 고통을 겪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데, 왜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쁜가?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연극이란 (연극에 뿌리를 두고 있는 뮤지컬 또한 마찬가지로)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현제를 이해하는, 더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정수연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는 어느 한 작품의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립 투쟁의 기개는 이제 역사적 재현을 넘어 상승적 주제로 승화될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녀의 말처럼 독립 투쟁의 기개, 더 나아가서 민족의 아픔은 이제 역사적 재현을 넘어 상승적으로 승화될 필요성이 분명해 보인다. 역사적 재현에 그쳤던 작품은 그동안 너무 많지 않았는가. 뮤지컬 <아리랑>에게서 여러 창작극들의 대목이 겹쳐서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일제에 잡혀 사형대 앞에 선 ‘수익’의 모습은 분명 <영웅>의 ‘장부가’를 떠올리게 하고, ‘감골댁’이 “참으면 참아지고, 잊으면 잊어진다.”며 노래하는 대목은 <서편제>의 ‘살다보면 살아진다.’가 오버랩 된다.

이렇듯 기존의 작품들로도 포화된 카테고리에 비슷한 작품을 한 개 더 추가하는 것, 그때의 아픔을 재확인하고 ‘우리끼리’ 가슴아파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막을 내린 배삼식 작가의 <1945>가 빛났던 까닭은, 상승적 주제로의 승화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리랑>과 <1945> 모두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이야기함에도, 두 작품이 완성도면에서 보인 차이는 현저했다. 커튼콜 때 관객들에게 아리랑을 따라 부르게 하는 것보다는, 또 일본군 역의 앙상블들이 “스미마셍!”을 외치며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보다는, 절대 악에 유린당하는 소녀의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 보다는, ‘미즈코’에게 립스틱을 바라주며 예쁘다고 말하는 ‘명숙이’의 모습이 몇 배는 더 성숙해 보인다. 주제의식에 매몰되지 않은 이야기란 바로 이러한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민족의 아픔과 울분을 세계에 알리려면

장면 장면이 가지고 있는 힘은 분명 <아리랑>의 큰 강점이다.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무대에서 펼쳐지는 ‘훈춘사건’과 ‘경신참변’등의 많은 역사적 비극에 가슴은 절로 뭉클해진다. 또한 커튼콜 때 많은 관객들이 다 함께 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순간은 한 민족끼리의 묘한 동질감마저 자아낸다. 그러나 그렇게 훈훈한 마음으로 객석을 나서려는 찰나 눈에 들어온 외국인 관객의 모습은 다시금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을 고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뮤지컬 <아리랑>은 참으로 많은 역사적 아픔들이 작품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적 사건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과잉되어 있다. <아리랑>은 일종의 믿음이 있었던 듯 보인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다른 작품들에서 이러한 종류의 사건들을 이미 듣고 읽고 보아왔으니, 별다른 설명 없이도 한국 관객들은 당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이해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이 믿음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믿음이 외국인 관객들에게까지 통용될 수 있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들은 우리민족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관객들이니 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 필자 또한 크게 공감하다. 미래는 지난 과거의 바른 정립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뮤지컬이 만들어지는 취지 역시 공감한다. 좋은 책 한권, 좋은 공연과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필자로서는 더욱이 그렇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작품에 쓴 소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과 뮤지컬이란 장르를 통해 밝혀야 하는, 밝혀져야만 하는 역사적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의식만으로 과잉된 작품은 이제는 곤란할 것이다. 영화나 공연과 같은 서사물은 결국 이야기여야 하기 때문이다. 멋들어진 이야기에 주제의식이 살짝만 첨가되어도, 작품의 맛과 주제의식은 살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렇듯 무거운 소재를 택한 작품이라면, 그 어떠한 작품보다 더욱 완성도 높게 시장으로 나와야 하고 이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도 더욱 냉정해야 하지 않을까.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좋지 못한 결과물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비슷한 작품들이 참으로 많았고, <아리랑>도 여전히 한발자국 더 나아간 수준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이런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연극과 뮤지컬, 영화에 있어서 우리가 아직은 과도기적 단계를 거치고 있다는 희망, 그래서 어느 순간 <1945>와 같이 완성도 높고 성숙한 작품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 말이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들이 늘어나 세계에 우리 민족의 아픔을 널리 알린다면, 공연계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에도 지금보다는 ‘좋은 호시절’이 오지 않을까?

* 다른 공연의 리뷰기사는 아트엠콘서트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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