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를 모티프로 하는 '삼국유사 연극만발'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이다.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삼국유사에 나오는 특정 에피소드를 참고로 삼아 만들었을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번 연극 '무극의 삶'은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과 그를 돕는 무극을 비롯한 젊은 청년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래서 책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과 해석에 대한 그들 내부의 갈등, 그리고 책을 미리 검열하고 정제하고자 하는 몽골 출신 왕비와 힘 없는 고려왕을 둘러싼 또 하나의 갈등이 이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한 내용이 된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기의 상황을 비추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먼저,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여 후세에 고이 전해줄 역사서를 편찬함에 있어 어떤 내용을 넣고 뺄 것인가에 대한 갈등은 기록으로 남길 역사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다툼이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말하듯 야사 역시 역사와 기록으로 남아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생각처럼 흔히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들만이 남겨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인 것이다. 극 속에서 무극이 야사를 적은 사초를 끝까지 보호하고 결국에는 책 속에 남기는 것은 역사가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요, 정사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삼국유사 속에서 지켜냈음을 보여준다. 결국 학창 시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점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그 부분이 이러한 갈등을 거쳐 삼국유사에 녹아 들었을 것이라는 상황에 대한 창작극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지려고 하는 현대의 기록물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보다 더 극 전반을 지배하는 갈등은 고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외세의 대변자인 왕비와 힘 없는 고려의 국왕, 그리고 자신들이 쓸 내용을 왕비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무극 등의 저술가 사이에서 벌어진다. 뭐, 누가 보더라도 사전 검열에 대한 이야기이다. 피지배측의 역사기록이 달가울리 없는 지배측은 어떤 내용을 실을 것인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며 저자들을 탄압하려 하고, 그것을 막아줘야 할 고려 왕은 힘이 없으니 할 수 있는게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정말 아무 힘이라고는 없는 무극과 그의 동료들이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그들의 원고를 숨기고 지키고 살려내는 과정이 극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그로부터 7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가 감시하는 눈을 피하며 글을 써야 하는 시대이다보니 심지어 글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마저 힘 가진 자로부터 글로 인하여 공격을 받는다. 고려 시대보다 한 줌도 나아지지 않은 현대 한국 사회가 그대로 비추어지는 작품이다.



이렇게 주제의식은 뚜렷하고 드러나고 공감하기도 아주 좋은 연극인데... 안타깝게도 이런 내용들을 관객 앞에서 풀어가는 방식은 영 안타까웠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매우 지루하다. 중간중간 조역/단역들이 보여주는 웃음 코드가 있기도 하고, 주요 인물들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어 극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그런데도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110분이라는 공연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알 수 없는 - 어쩌면 현학적이기까지 해 보이는 대사와 배우들의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대를 둘로 나누어 무극과 동료들이 있는 공간, 왕비 등이 주로 나오는 공간을 표현한 것은 극의 고유한 특징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공간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공간 속에서 서로의 동료들과 주고받는 대사나 행동들이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느낌이라서, 충분히 짐작 가능한 대사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어야 했는데도 (느낌상)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내내 발생한다. 대사와 무대 위에서의 행동들을 좀더 정제한다면, 더 짧은 시간에 더 축약된 내용으로 더 강한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인데도 그렇게 늘어지는 대사와 연출을 사용한 이유를 모르겠다. '절'이라는 공간과 '고려시대'라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런 느린 호흡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현재 극장에 앉아있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만드는 것은 좀 아니지 않았나 싶다. 작품의 전개가 느려지면서 인물들의 관게 역시 덜 밀접하게 느껴지는 효과까지 따라오더라. 이렇게 되면 아무리 인물 소개가 잘 되었다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갈등을 객석에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진다. 어디에선가 저들 사이의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더라도, 너무 오랜 (무대에서의) 시간이 지나버리는 느낌 때문에 그런 배경이 묻혀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대 작품에서 호흡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대부분 인상적이었다.

역시나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주인공 무극을 연기한 윤정섭 씨, 극의 처음과 뒷부분에서의 인물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서도 무극이 하나의 흐름 속에 있도록 보여주었다. 특히 많은 대사 없이도 사료와 야사에 애정을 보이는 무극의 모습을 몸짓으로 보여주었던 연기는 꽤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예전에 '맥베스' 등의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본 적 있던 배우였는데, 역시나 한 번 인상적이었던 분은 계속 그렇게 된다. 그리고 몽골족 출신 왕비를 연기한 (아마) 이자경 씨... 그렇게 늘어지는 호흡으로 진행되는 작품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카랑카랑한 캐릭터로 극의 긴장을 잡아주었다. 아마 이 분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110분짜리 연극을 220분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글을 마무리 하기 전에 이번 후기를 쓰기 위하여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 하나...

이번 연극 '무극의 삶'에서는 '무극'이라는 인물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을 돕는 인물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다. 실제로 극 속에서 일연이 잠깐 등장하기도 하니, 확실히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의 처음부터 내내 저술 활동을 주도하고 마지막에는 삼국유사의 마무리까지 담당하니 그냥 단순한 조력자는 또 아니다. 사실은 일연의 여러가지 호 중 하나에 '무극'이 있더라. 즉 '무극의 삶'은 '일연의 삶'이었고, 이 극 속에서 보여주었던 무극의 행동과 생각이 대부분 일연의 것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돌아 애기한 이유는... 직접적으로 일연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보다 좀더 다가가기 쉬워졌다거나, 알고보니 일연이었다는 좀 더 강한 메세지를 주기 위함이었을까???

* 기록... 출연 - 이자경, 김승환, 김성태, 이창수, 백종승, 윤정섭, 유명훈, 김성환, 안병찬, 김미정, 노창균, 윤진. 감독- 김윤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