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관찰로 완성된 새로운 고전, 서울시 오페라단의 <사랑의 묘약>
동화 속 주인공들을 떠올려보면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신데렐라나 심청 같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 속에서도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명백하다. 신데렐라나 오즈의 마법사를 아주 피상적으로 떠올려보면 여자들은 풍성하게 부푼 드레스나 활동하기 쉬운 원피스 복장을 하고 있고 남자들은 야외활동과 사냥을 위한 간편한 복장을 하거나 갑옷을 입고 있거나 재킷과 셔츠를 걸치고 있다. 반면 상상 속에서 심청이나 춘향전의 인물들은 언제나 한복을 입고 있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이렇게 굳어진 상상을 동서양의 조화로 자연스럽게 허물면서 새로운 옷을 입은 고전적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네모리노와 아디나가 살고 있는 마을은 붉은색으로 무대를 비추면 붉게 빛나고 푸른색으로 무대를 비추면 푸르게 빛나는 새하얀 한복을 입고 추수를 하고 빨래터를 드나들고 아이를 돌보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이다. 네모리노는 마을 사람들처럼 새하얀 한복을 입고 짚신을 신은 순박한 마을 청년이었지만 서양식 재킷과 셔츠를 입은 약장수 둘카마라와 양철 갑옷을 입은 군대를 거느리고 군복을 입고 있는 벨코네를 거치면서 마치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서구화되듯 둘카마라와 벨코네의 겉모습과 서서히 닮아간다. 반면 아디나는 새하얀 한복을 입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서양의 여성복을 한복의 비단소재로 개량한 듯한 폭이 좁은 붉은색 치마를 입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이야기가 적힌 책을 들여다보는, 근대화시기에 신여성이라 불릴만한 이색적인 존재였지만, 네모리노의 진심어린 순정을 거치면서 새하얀 한복으로 만든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 등장한다.
로맨스 장르가 아름다운 이유는 가상에 불과할지라도 어떤 화합의 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탈리아 시골 마을의 사랑이야기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은유하는 이야기로 바뀐다. 한복을 입고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는 멜로드라마를 무대 위에 올리면서 점점 서구화 되어가는 지구촌에서 가장 소외된 역사를 환기한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각국이 각자의 민족적 색채에만 치우쳐있던 지금까지는 있을 수 없었던 동화이다. 이는 연출과 무대디자인과 의상디자인이 이탈리아적 시각에서 본 한국의 유물을 이야기 속에 재현하고 있고 음악을 담당하는 제작진과 출연진들이 한국의 감수성으로 습득한 외국의 지성을 무대 위에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무대이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이 완성된 시기에는 벨칸토 창법이 유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기자기하고 기교가 넘치며 유려하지만 무대 위에서 표현해야 하는 인물의 성격에 따라 변화하는 이 창법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의 묘약’이란 노래하는 인간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품위 있고 미려하게 이번 무대를 장식했다.
소프라노 홍혜란의 아디나는 콧대 높은 아디나의 성격만큼이나 첨예했지만 새의 울음소리처럼 아름다웠다. 테너 허영훈의 네모리노는 웃음소리를 닮은 부드럽고 풍요로운 미성으로 관객을 설레게 했으며 베이스 양희준의 둘카마라는 약장수 특유의 말투처럼 기교가 넘쳤다. 바리톤 한규원의 벨코네는 군인의 위상을 보여주려는 듯 권위적인 무게가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성악이 인간의 목소리가 가장 인위적으로 가장 웅장하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분야라는 인식을 깨뜨릴 만큼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가곡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치 부드러운 물속에 있는 것 같은 오케트스라의 연주도 날카롭지 않고 둥글었지만 오케스트라의 활약보다도 마을사람들의 합창과 하모니에 훨씬 중점을 두면서 이날의 노랫소리는 세이렌의 목소리에 빨려 들어가듯 세상살이에 부딪치면서 생기는 부정적 감정들을 정화시키면서 관객들을 예술을 통한 치유의 장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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