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서 가해자는 시인으로 피해자는 습작생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문단이라는 분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계 전반에 걸쳐 있는 성폭력과 수직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폭력 문제를 다룹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피해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가해자의 스승, 동료 등 가해자 주변 사람들이 증언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진행됩니다. 설정 자체가 성폭력에 대한 탐구와 방지를 위해 책을 쓴다는 설정으로 실제로 책을 읽는 것 처럼 연극이 진행됩니다.

성범죄가 있었음에도 거장으로 칭송받는 서양의 시인들을 언급하면서 한국은 왜 그렇지 못하는가 라고 한탄하는 시인, 가해자에게 너는 너무 시인이었다 라고 말하는 스승 등...

처음에는 성폭력에 대한 일종의 고발인가...예상했지만 연극을 보면 볼수록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결국은 묻히게 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저는 되려 연극이 끝날 즈음에 가해자들이 진짜 가해자인건가...혹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배우들이 날리는 엄청난 대사 중에는 상당히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많아서 자칫 불쾌감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가해자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더럽고 치졸한 그들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남산예술센터의 의자가 너무 불편해서 연극 말미 즈음에는 집중력이 떨어져서 배우들 대사를 좀 놓치긴 했지만 독특한 연극이었습니다. 대사가 너무 많고 익숙한 구성이 아니라서 긴장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기 쉽상이겠어요.

배우분들 발음과 발성이 좋습니다. 대사가 귀에 쏙쏙 꽂힙니다. 대사량이 워낙 많아서 실수가 조금 있지만 첫 공연인데 그 정도면 상당한 실력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