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들을 살짝 비틀어 낯설게. 트렌디한 것들의 바탕에는 그 낯설음이 깔려 있다. 수학여행과 몇 번의 출장을 거치며 경험했던 제주의 익숙한 풍경들이 어느 샌가 살짝 각색되어 트렌디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익숙한 듯 낯설어져 다시 사랑이 샘솟았던 제주의 면면을 모았다.

# 12:00 메종글래드 아자리아
분주했던 아침과 짧은 비행을 마치고 제주공항에 내리면 신선한 제주의 공기가 맞이한다. 아직 체크인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은 정오. 메종글래드 호텔의 한식당 아자리아로 향한다. 카운터에 짐을 잠시 맡겨두고 홀가분한 몸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제주 향토요리를 세련된 감각으로 재해석한 곳이란 점에 끌렸다. 제주산 흑돼지와 도미, 한치, 돌문어, 전복, 황게까지 화려한 라인업으로 무장한 코스메뉴를 택했다. 평소 비염 때문에 맛을 잘 구별 못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흑돼지 오겹구이에서 은은하게 스모키한 향이 느껴졌다. 감귤나무장작으로 구웠단다. 한치산적과 고등어조림, 해물뚝배기까지 차례로 즐기고 나니 체크인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 옷에 냄새 밸 걱정없이 흑돼지를 이렇게 깔끔하게 즐기다니.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산뜻하다.
 

# 14:30 당근가게
느긋하게 걸으며 소화시키다 기념품 샵 겸 카페인 당근가게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수학여행지에서 만나볼 법한 조잡한 완성도의 중국산 기념품은 찾아볼 수 없다. 공예 작가들이 직접 만든 아기자기하고 개성 넘치는 핸드메이드 상품이 가득하다. 현무암이나 뿔소라, 한라봉 같은 제주 특산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캔들도 귀여웠지만 무엇보다 해녀캐릭터가 들어있는 글래스 스노우볼에 마음을 뺏겨 당장 구입했다. 위트 넘치는 아이디어가 가득한 기념품 몇 개를 선물로 고르고 나니 회사에서 센스남으로 등극하게 될 며칠 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15:30 제주 만복이네 김밥집
흔해 빠진 김밥도 제주에 오면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는다. 전복김밥, 통전복주먹밥, 성게미역국., 전복성게해물면… 김밥과 분식 메뉴에 지역 특산 해산물을 더해 깔끔한 비주얼로 재탄생시켰다. 만복이네 김밥과 오징어무침을 테이크 아웃했다. 전복내장과 살짝 간이 되어 있는 밥, 그리고 계란이 사이좋게 맞붙어 있는 모양새며 야외에서 먹어도 불편함 없는 단단한 일회용 용기까지 만든인의 정성과 배려가 느껴졌다.

 

#16:40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1+2
1990년대 제주시에서 가장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일도1동에는 여인숙, 여관, 모텔이 많았다. 신도심이 생긴 이후 쇠락한 이 동네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폐건물 동문모텔은 한 아트컬렉터가 박물관으로 새롭게 꾸미면서 트렌디한 이색전시공간으로 거듭났다.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은 Ⅰ과 Ⅱ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었다. 만원으로 두 공간을 모두 관람할 수 있고 아메리카노 한 잔까지 제공된다는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동문모텔Ⅰ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수십년 전 모텔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낡은 벽면을 따라가다보니 한 때는 침대가 있었을 법한 방에 미술작품들이 놓여있다. 을씨년스러운 폐건물의 흔적을 애써 감추지 않고 설치미술작품과 조화시켜 예술로 승화시킨 감각에 내심 감탄했다.
 

#17:40 탑동시네마&바이크샵
1999년 탑동에 세워진 시네마극장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네 개의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다. 하지만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 영화관이 전국 방방곡곡을 점령하면서 시네마극장도 결국 2005년 폐관했다. 한 때는 영화관이었던, 그리고 바이크샵이었던 공간은 채도높은 빨간색 외벽으로 둘러싸인 강렬한 인상의 건물로 변신했다. 동문모텔이 모텔방 크기에 걸맞는 아담한 실내 전시품으로 가득했다면 탑동 시네마와 바이크샵은 넓고 천장이 높은 공간의 장점을 살려 대형 설치미술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 19:30 산지등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등대 16경 중 하나로 꼽히는 산지등대. 붉은 석양과 푸른 밤하늘이 그라데이션 되는 경계점에 하얀 등대가 서 있었다. 바쁘게 이곳저곳을 둘러 본 분주한 하루를 차분하고 센티멘탈하게 마무리하기 좋은 공간이다. 등대는 외로움의 상징이지만 이곳은 주변의 야경과 조명이 어우러져 쓸쓸하지는 않다. 뭐라 색을 형언하기 힘든 색깔의 하늘과 반짝거리는 제주의 야경. 이 황홀한 광경을 등대 옆에 기대어 감상하다 보니 나도 자연이 만든 회화 작품의 일부분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