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에 대한 두려움, 빛과 소리만으로 끌어내..

연극 ‘우먼 인 블랙’(Woman in Black)의 주인공은 조명과 음향이다. 떨칠 수 없는 유령에 대한 공포를 무대로 불러내 어루만지는 이 작품에서 어둡고 음산한 조명과 오싹 소름이 돋는 음향은 몽유병처럼 배우들을 일으켜 내키는 대로 조종하고 혹사시킨다.

이야기는 한 중년 법무관 킵스(이호성)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실제 연극배우(이상직)와 함께 한 편의 연극을 준비하면서 시작된다. 젊은 시절부터 킵스를 괴롭혔던 검은옷을 입은 유령에 대한 이 연극에서, 고용된 배우는 젊은 시절의 킵스를, 실제 킵스는 그 밖의 등장인물들을 맡는다. 처음에 수줍음을 많이 타고 서툴던 킵스는 연습이 진행될수록 놀랄 만큼 연기가 대담해지고, 연극과 현실은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자꾸만 포개진다.

극중극은 보통 연극이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싶을 때 짜는 형식이다. 이 연극에서 킵스는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진짜 연극을 한다. 그가 배역에 가까워질수록 이야기는 현실에서 연극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병적인 환상을 치료하는 데 쓰는 사이코드라마적 냄새를 풍기며 출발한 연극은 늪처럼 관객의 발목을 잡아당기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를 전염시킨다.

무대에 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지만 객석에서는 거듭 비명이 터져나온다.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15년 동안 장기 흥행할 수 있었던 건 두려움을 주무를 줄 아는 빼어난 감각 때문이었다. 홍콩 출신의 와이킷 탕이 연출한 이번 한국 초연 무대에서도 그 장점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검은옷을 입은 여성은 정말이지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공간을 잘 활용한 무대는 음향과 조명 덕에 순식간에 유령의 집으로 탈바꿈한다. 놀라운 일이다. 흔들의자가 내는 소음만으로도, 희미한 손전등 불빛만으로도 객석을 얼어붙게 하다니.

이호성과 이상직의 연기도 믿음직하다. 해설자까지 여러 역할을 맡은 이호성이 유령을 떨쳐내는 동안 이상직은 점점 유령에 사로잡히지만, 두 배우 모두 균형잡힌 연기와 호흡으로 감정의 진폭을 견뎌낸다. 오랜만에 밀도 높은 2인극을 볼 기회다. 금요일에는 10시30분 심야공연도 있다. 3월 28일까지 서울 제일화재 세실극장.

출처 :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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