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는 9월의 한 자락, 국립극장 남산 이전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의 문제작 <문제적 인간, 연산>이다.
공연 꽤나 보고 다니는 척 하던 나였지만 국립극장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연극을 보게 되어 거짓말 약간 보태서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그것 또한 8년 만에 올려지는 문제작가의 문제작이자, 이 시대의 문제작이기도 한 작품을 말이다.

무대는 궁궐의 기둥과 언덕, 대나무숲,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웅장하고 위압적인 왕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스러져가는 왕의 권력과 몰락을 상징하듯 바랜 단청과 부서진 문짝만이 성성하다. 언덕은 흡사 무덤과 같고, 연못 또한 망자의 쉼터 같은 곳이다. 그러나 극이 결코 정적인 것은 아니다. 인물들은 그 커다란 무대 곳곳을 뛰어 다니며 극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이 연극은 짐짓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떠오르게 한다. 윤비의 영이 나타나는 장면, 대나무 숲을 떠도는 연산의 모습, 모략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왕의 모습 등 이것은 흡사 햄릿의 그것이다.
굳이 햄릿을 원형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연산이라는 인물 속에서 햄릿의 일면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죽인 충신 처선의 혼령이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장면은 <맥베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자신은 자신의 정의대로 행동하였지만 그가 부른 피는 너무도 진했다. 연산의 욕망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으나, 또한 가장 비인간적 행동을 동반하게 했다. 어쩌면 작가는 그저 너무나도 익숙한 서양의 극을 끌어와 오히려 낯설게만 느껴지는 우리의 극이 친근하게 다가오도록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굳이 이 연극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양의 극형식과 전통연희가 혼재하여 일곱빛깔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연극적 경험을 느낄 수 있다. 이 극의 악사와 배우들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극 안에서 뛰고 논다. 이 점은 전통 연희의 형식에서 나온 것이다. 또 한편으로 악사는 극의 시작과 쉼을 알리는 일을 맡으며 서양극의 해설자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악사의 연주, 죽은 윤비의 혼령이 부르는 애절한 노래소리에 이어, 연산과 녹수의 사랑은 아름다운 한바탕 춤으로 아름답게 형상화되고, 배우들의 대사는 흥겨운 노래가 되기도 하고 하나의 선언이 되기도 한다.
음악과 춤과 문학이 혼재하는 이 연극은 무대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적절히 섞어두었다. 일단 관객의 눈을 잡아끄는 데는 성공했다는 느낌이다. 사극이란 장르가 줄 수 있는 지루함은 이 극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연극성 앞에 한 걸음 주춤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변적 사색과 신변잡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사극은 TV드라마로만 익숙할 뿐 연극의 소재로는 다소 낯설다. 그러나 ‘연산’이란 이름은 결코 낯설지 않다. 몇편의 드라마에 심심찮게 등장하여 많은 이들에게 그 명성만은 확고하나, 그에 대한 이미지는 오로지 한 단어로 압축되어진다. 그것은 바로 ‘폭군’.
물론 극을 올리기 위해 쓰여진 작품이라면,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시대만을 조망할 리 없다. 똑같은 시대 똑같은 인물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작가만의 마지막 잣대이자 보루인 ‘관점’이, 한 사건을 그리고 한 인물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연산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폭군’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흔들리는 한 왕을, 그리고 어머니의 서러운 죽음 앞에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극중의 연산은 개혁을 하노라고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습들이 진정한 개혁으로 비춰질 것인가 하는 점에는 의문이다. 복지부동한 대신들과의 대립 또한 철저하게 개인적인데다가, 왕으로서 겪어야 하는 부당한 처사들이 불합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당대의 부조리를 다루었다고 보기에는 더욱 어렵다. 결국 문제적 인간 연산의 폭군 외의 면모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나약하면서도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면의 다른 모습은 발견할 수 없어 아쉽기도 하다.

출처 : 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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