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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그리고 삶에 대한 물음…박근형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리뷰

작성일2019.07.12 조회수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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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이 많은 한 시골마을, 세월의 때가 탄 낡고 작은 기와집이 무대 한 가운데 놓였다. 마당 한 켠에는 수압이 약한지 늘상 쫄쫄대며 물을 뱉어내는 수도관이 서 있고, 그 옆엔 폭염 속에 새끼를 배어 애처롭게 낑낑대는 노견 한 마리가 있다. 이 집의 주인은 한 평생 밭만 일구며 살아온 창호 부부다. 얼마 후, 별다른 일이 없을 것만 같던 이 마당이 뜻밖에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이 집에 모여든 인물들은 서울에서 교수 겸 방송인으로 승승장구하다 사고를 치고 이혼까지 당해 집에 내려온 창호의 아들 재철, 창호의 도박꾼 동생 창식과 그의 친구 거북이, 창식의 아들이 무책임하게 버리고 떠난 여자 경애와 그녀의 아기다. 여기에 이 집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우편 배달을 핑계로 걸핏하면 찾아와 동정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들로 속을 긁고 가는 재철의 후배 명환,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며 찾아온 재철의 아내 은희까지. 이들은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아버지’,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등을 작/연출했던 박근형 연출이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에서 탄생시킨 인물들이다.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창식이 친구에게 연두부를 받아먹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극은 얼핏 도시 속 분주한 현대인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요즘은 카카오란 걸로 택시를 부른다”며 철 지난 폴더 폰으로 택시를 호출해 타는 두 장년 남자의 모습이 시대를 비껴간 듯 생경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관객은 이어지는 극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최근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어떤 사건과 놀랍도록 닮아 있으며, 고즈넉한 시골 마당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가 실은 속죄와 삶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전작들에서 삶의 여러 풍경을 생생한 대사와 인물로 압축해 그려냈던 박근형 연출은 이번 연극에서도 꼭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 법한 인물들을 무대로 소환했다. 도박꾼의 세계에서는 나름 위세 등등한 사내지만 아들이 버리고 간 여자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고향에 데려가는 창식, 영악하다고 욕하던 며느리가 막상 찾아오자 그저 미안함에 눈물 흘리며 나물보따리를 쥐어주는 창호의 아내, 그렇게 대책 없고 무능하거나, 혹은 이기적이고 모순되면서도 동시에 마지막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고 삶을 꾸려가는 인물들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어려있는 연출의 시선은 그대로 따스한 유머로도 이어진다. 막걸리를 권하는 어른에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어느새 그것을 텀블러에 따라 담는 명환이나, 아들 재철에게 “네가 강용석이라도 되냐”며 버럭 소리치는 과묵한 창호의 모습 등을 보며 객석에 앉은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은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연극의 제목처럼, 때때로 삶은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기만 한 고역의 나날로만 느껴진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잘 나가던 아들의 추락으로 온통 마음이 무너진 창호의 아내가 도박꾼 조카 덕에 맞게 된 조카며느리와 손주를 보며 본능적인 기쁨과 사랑을 느끼고, 누군가가 극심한 고통 속에 생과 사를 오갈 때 마당 한 켠에선 강아지들이 태어나는 것처럼, 생은 고통과 기쁨이 나날이 교차하는 신비한 생명의 장이자 희비극이 교차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삶의 진실을 이 연극은 덤덤히 이야기한다.
 

지난해 공연계에선 한차례 거센 '미투' 운동이 일었다. 한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연출가로 꼽히는 박근형 연출은 그 가운데서 가해자로 지목된 선후배들의 여러 대응과 피해자들의 눈물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 연극은 그 과정에서 박근형 연출이 이어왔을 성찰의 한 결과물로도 읽힌다.(극의 중요한 결말을 미리 밝힐 수 없어 그 연관성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기로 한다.)

물론 그가 이 극의 결말을 정답으로 제시했으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각기 불완전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인간 군상을 연민의 눈으로 그려낸 이 극의 충격적인 결말은 쉽게 가시지 않는 울림을 남긴다. 죄는 어떻게 씻길 수 있으며,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또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작가는 이 한 편의 작은 연극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또 말을 건네고 있다. 방은희, 강지은, 성노진, 서동갑, 이봉련, 오순태, 이호열, 김은우, 한충은, 유호식, 이상숙 등의 열연으로 완성되는 이 공연은 오는 21일까지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볼 수 있다.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극단 골목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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