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다양한 시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낙태에 대해서 이렇게 가볍게 진중하게 다루는 극은 또 못 볼 것같다. 세상 사람들은 낙태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지만 낙태는 전혀 그런 문제가 아니며 그것을 겪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걸 역설하는 연극. 매년 보고싶습니다

아무생각없이 보러갔었는데 기대이상으로 너무 잘만든 공연이어서 잘 보고왔습니다! 텍스트가 너무 좋아요 배우님들 연기도 너무 좋고ㅠㅠ

  1. 연극 마른대지

  공연 장소는 연극공간 혜화였는데, 좌석은 좀 불편했다. 단차도 의자 높이도 작은데 키가 큰 편이라, 거의 접이식 의자 놓고 쪼그려 앉는 수준... 뒷열 분도 엄청 가리실 것 같아서 어떻게든 내리는데 목 등 다 뻐근했다. 그래도 중간에 암전이 좀 있어서 자세 정리할 시간이 나서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극이 주로 진행되는 장소는 수영장 라커룸, 미국의 플로리다 주 어느 고등학교이다. 수영부(방과후 활동이라기보단 진짜 학교에서 양성하는 운동부 느낌)인 에이미, 같이 수영부이며 수영 유망주이자 친구인 에스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그 외에 친구도 등장하고, 에스터 엄마의 친구네 아들도 등장하고, 수영장 관리인도 등장하지만, 극을 주로 이끌어가는 건 에이미와 에스터 둘이다.

  극 시작부터, 에이미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상태이다. 그래서 에이미는 임신을 중단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에스터에게 자신의 배를 힘껏 쳐달라고 요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스터는 에이미의 몸이 상할 걸 걱정하면서도 에이미를 돕는다.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서로 갈등하기도 한다. 대체 왜였을까? 굳이 말하자면 에이미의 잘못이지만, 글쎄. 난 그 감정의 흐름이 이해가 가서 더 안타까웠다. 나랑 가장 친한, 심각한 비밀까지 공유한 사람에게 의지할수록 미안해서 이 사람을 밀어내고 싶은 감정들. 나와 친하지만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서 내 앞에서 친해지는 걸 보면서 좋으면서도 뭔가 바라만 보게 되면서 불현듯 살짝 떠오르는 심술. 나를 너무나 좋아해주는 사람의 그 나를 좋아하는 감정을 돌려줄 수 없어서 미안함을 꾹 참고 냉정하게 서운하게 대하게 되는 그,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감정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후회할 실수들을 억지로 하게 되니까.

  그 갈등들, 그 후에 에이미와 에스터는 다시 만난다. 에이미는 후회할 줄 알고서 했던 그 일들을 후회하기에 쭈뼛쭈뼛 다가선다. 에스터는 선발 테스트를 보러 간 대학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에이미의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을 덮기 위해 에이미가 덮어쓴 오명과 위악을 알게 된 후에.

  다시 만난 에이미와 에스터. 에이미는 인터넷에서 위조신분증과 친구에게 빌린 체크카드로 약을 구입한 후 약을 복용한 상태였다. 에스터가 우연히도 에이미를 만나기 위해 수영장 문을 열어놓고 에이미를 불렀고 갈 곳이 없는 에이미는 에스터에게로 온다. "조금 있으면 검고 찐득한 피가 나올거야." "난 어차피 지금 갈 곳도 없어.". 마치 뭐든 알고 산전수전 겪은 양 굴던 에이미지만, 계속되는 진통에 고통스러워하고 에스터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수영 연습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한다. 에스터는 마찬가지로 두렵지만, 에이미를 위해 재미있는 일화를 마구 쏟아낸다. 이때 에이미와 에스터가 일상의 바깥으로 몰려나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나서 마음이 아팠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난 후, 에이미와 에스터는 바닥에 가득 고인 피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떠나버린다. 그 후에 건물관리인이 들어오는데, 이 건물관리인은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저 아무 말도 없이 피에 푹 적셔진 신문지를 버리고, 대걸레로 피를 말끔히 닦아내고, 휴지통을 비우고 다시 들어간다. 이 장면이 이 연극에서 나에게 가장 힘들게 그리고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 건물관리인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이전에도 그렇게 피를 닦아내고, 오늘도 피를 닦아냈고. 어쩌면 다음에도 그래야 함을 알고 있다.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에이미와 비슷한 상황에 빠진 여성 청소년들이 흘린 피가 고였다가 닦여나갈까 하는 생각에 많이 답답했다. 약간 우울하게 가라앉은 듯하면서도 무표정한 관리인의 표정에서 너무 많은 것이 읽혀져서.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절친이 된 에이미와 에스터는 다시 수영 연습을 하기 위해 라커룸에서 연습 순서를 기다린다. 그리고 에스터는 자신이 수영특기생으로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축하하는 에이미. 먼저 수영 연습을 하러 들어간 에스터. 라커룸에 혼자 남은 에이미는 에스터의 수영 연습 영상을 보며 웃고, 또 눈물을 흘린다. 관객이 볼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160; 이 극을 보면서 최근에 본 뮤지컬 <스페셜 딜리버리>가 많이 생각났다. 둘 다 여성 청소년의 임신과 임신중절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마른대지의 에이미는 결국 임신을 중단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스페셜 딜리버리의 하리는 마지막에 아이를 낳는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의 진짜 차이는 이 부분이 아니다.

&#160; 임신을 중단할 것인지 말지는 온전히 임신을 감당하고 있는 여성의 선택이라는 것. 스페셜 딜리버리에선 이게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다. 하리는 임신중절을 원했지만 이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내몰린 선택이었고, 임신중절을 만류하는 정사랑도 임신중절을 못하게 폭력을 가하고 강요하는 혁세 모두 하리의 선택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정사랑은 이것이 하리의 선택의 문제라는 걸 이해하게 되고, 라라는 하리에게 이것이 정말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며 그 선택을 믿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혁세는 뭐... 깜빵 갔겠지. 결국 스페셜 딜리버리의 결말이 드러내는 건, 임신한 여성 청소년인 하리가 정말로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선택이 생존 상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다다른 선택이 아닌 진짜 자유로운 선택이려면 그를 위해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개인들, 소수자들이 환대로 서로를 맞이하는 환대의 공동체를 스페셜 딜리버리는 하나의 답안으로 제시한다.

&#160; 마른대지에선 임신 중절의 여부는 당연히 에이미의 의사에 맡겨져 있다. 하지만, 에이미에게는 하리에게 라라와 사랑이 있던 것과 달리 에이미를 지지하고 지원해줄&#160;다른 어른들이 없다. 에이미에게 있는 건, 에스터, 너무 착하고 좋은 친구지만 그래봤자 같은 나이의 청소년이고 또 많은 것이 서투른 친구. 마른대지에선 놀라우리만치,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있다고 해봐야 무심한 수영장 건물관리인 정도. 어른들-로 대변되는 사회-의 방치 속에서, 에이미와 에스터는 궁여지책으로 혹은 불법적인 경로로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에 맞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에스터와의 우정이 없었으면, 에스터마저 옆에 없었으면 에이미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외롭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른대지가 낭만적인 우정의 힘 혹은 여성연대의 힘을 말하고 우먼 임파워링을 말하느냐 하면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에스터에게도 에이미에게도 앞으로 너무나 길게 삶이 남아있고, 앞으로 가야 할 각자의 길이 있으니까. 에스터가 대학에 가게 되면 둘은 또 떨어지게 된다. 이제 큰일 하나를 해결했으니&#160;에이미와 에스터의 인생엔 아무런 고난도 없을까? 그렇지 않을 걸 알기에, 에이미와 에스터의 우정이 따뜻하게 다가오면서도 그 둘을 바라보는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에이미와 에스터의 우정을 믿으면서도, 결국 극의 끝에서는 대체 이들에게 사회는, 어른들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160; 극의 막바지에 에스터의 과제를 에이미와 에스터 둘이 읽는데, 플로리다 주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에버글레이즈 습지의 많은 면적을 매립한 이야기가 나온다. 에스터의 과제물을 함께 읽는 가벼운 분위기의 장면이지만, 이 부분에서 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이 사회, 동시에 전통적인 결혼제도 바깥에서 임신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보내는 이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위험천만한 임신중절을 시도한다.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았다더라, 어디서 불법으로 시술을 받았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들려온 이야기고 지금도 소외돈 어딘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마른대지(그리고 스페셜 딜리버리)&#160;이전에,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받고 또 선택의 자유 없이 한 쪽 선택으로 내몰려 고통받는 사람들을 극의 중심에 놓고 그들 자신의&#160;서사를, 선택의 시작과 그로 인한 결과까지의 과정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160;풀어낸 작품이 과연 얼마나 되었나를 생각해보면, 나로선 다소 불충분하단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없진 않았겠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순간들에 비해서 과연 이야기들은 얼마나 그 순간을 진지하게 다뤄왔는가? 그러한 상황을 토로하는 부분이 바로 "에버글레이즈 습지 위에 세워진 플로리다"라는 극 중 이야기인 것 같다. 그렇기에 확실히 마른대지라는 연극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임신중절을 인물의 전사로 설정만 하거나 혹은 무대 뒤 어딘가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처리하는 게 아닌,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다시 불러내는 것.


&#160; 2. 에이미와 에스터.

&#160; 무엇보다 연극 마른대지에서 좋았던 건, 에이미와 에스터 역의 두 배우, 황은후 배우와 김정 배우의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다는 점이다. 연기가 탄탄하기도 하고, 대사 처리가 능숙해서 몰입하는 데에 아쉬움이 없었다. 냉소적이고 약간 건들건들한 에이미와 어딘가 어눌하면서도 대화하는 상대에게 과하게 몰입하는 에스터. 특히 에스터 역의 김정 배우는, 진짜 신기할 정도였어 약간 속없이 헤실하면서&#160;어눌하고 띄엄띄엄한 말투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가 다 들리고, 그 감정이 다 보여서 놀라왔다.&#160;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지만 천성적인 따뜻함이 있어서 맞장구를 쳐주려는 사람, 그런 사람들 특유의, 그 대화 핀트에서 조금 엇나가고(묘하게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게 만드는 과한&#160;맞장구라든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그 말을 하는 눈빛과 한껏 기울여진 자세가 있다. 그래서 대화를 자연스레 이어나가기가 조금 곤란하더라도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아 이 사람이 나와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런 게 되게 잘 느껴져서 와 연기 진짜 좋구나. 라고 생각했다.

&#160; 무엇보다 에이미와 에스터 역의 두 배우가 합이 굉장히 좋았다. 처음에 전혀 친하지 않았던 둘이 어떻게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왜 갑자기 뜬금없이 벌컥 화를 내고 상대를 미워하게 되는지, 분명히 후회할 심한 말을 내뱉으며 독해지는 눈빛과 떨리는 호흡 그리고 세게 쏘아붙이면서도 어딘가 공허한 대사 표현에 부정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하고 혹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는 반응들이 되게 잘 보였다. 사실 소재를 보고 보고 싶어서 보러 간 극이었는데, 두 배우의 연기와 연기 합만 봐도 정말 잘 봤다 싶어지는 극이었다.

&#160; 음, 그리고 극 소개에도 극에 대한 경고로 욕설, 성적인 표현이 등장한다고 쓰여 있는데. 확실히 많이 나왔다. 잘 경고해 주신 듯...ㅜㅋㅋ

&#160; 욕설의 경우엔, 존나, 씨발같은 표현들이 나오는데, 애초에 평소부터 쌍욕이나 욕설을 일체 싫어하는 편이라 극에서도 나오는 걸 불편해하는 타입이다. 근데 그럼에도 엄청 거슬리진 않았던 이유가, 첫 번째로, 특히 욕설을 구하사는 부분에서 영어를 번역한 티가 좀 많이 났다.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랄까. 중간에 ''씨발!" "존나"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그 타이밍이란 게 알다시피 한국이랑 미국이 좀 다르기 때문에... 그 F word를 그대로 "존나", "씨발"로 번역해놓은 느낌이라서 쌍욕을 하는데 그 쌍욕 특유의 폭력적인 느낌이 조금 천천히&#160;왔다고 할까? 성적인 표현도, 뭐랄까 그 "청소년들이 실제로 쓰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의 그 어색한 느낌, 그냥 아... 저런 대사가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보통 이런 경우 이런 부분에서 연기가 확 떠야 하는데, 배우분들이 워낙 대사처리가 자연스럽고 이 대사들을&#160;칠 때의 표정이나 몸짓들을 잘 처리해서 던져줘서, 깨는 느낌은 아니고 그냥 아 공격적인 표현을 하는구나, 그런데 그게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서 쫄지않고 지켜볼 수 있는 느낌? 그래서인지 이런 부분도 배우들이 많이 고민해서 연습한 게 아닐까 싶었다.

&#160; 사실 이 극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건 피였다... 피를 그렇게 안 무서워하는 편이라 에이미가 하혈하는 장면에서도 아이고, 피가 나오는구나 정도였는데, 암전되고 다시 켜지니까 바닥에 피가 한 바가지 흥건하게 있는 건 조금 쇼크가 오긴 했다. 진짜 피랑은 색이 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중간중간 덩어리져 있는 질감 표현 같은 부분은 확실히 피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피하든 각오 좀 하고서 보던 해야 할 것 같았다.

&#160; 처음 마른대지를 보기 전에는, 소재도 소재이니만큼 좀 충격적이고 막 절규하고 좌절하는 장면이 힘들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근데 위에 말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오히려 담담한 시선을 유지하는 작품이다. 클라이막스에서 두려움과 고통에 떠는 에이미와 에이미를 달래기 위해 노력하는 에스터가 나오긴 하지만, 그 장면도 막 과한 연기라기보단 실제로 그럴 것 같은 연기에 가깝고, 그 외에는 하다못해 목 꽉 조여서 소리로 후려치듯이 비명 빽 지르는 장면도 거의 없는 데다, 막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내기보단 마치 말하기 힘든 내용을 말할 때 상대가 못 듣고 지나치길 바라며 툭툭 던지는 것처럼 이야기가 풀려나와서, 막 흘러넘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야기와 인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해도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깊게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었어서... 소위 말하는 MSG를 전혀 치지 않아서 다행이고 또 좋았다.

&#160; 이런 요소들이 합쳐지다보니, 에이미와 에스터가 극 중 등장인물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상징이 아니라) 대표한다는 느낌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러나지 못했던, 혹은 비하인드 스토리로 남았던 어떤 사람들의 삶 속 한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고...

&#160; 3.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

&#160; 그래서 내가 이 마른대지라는 연극을 보고 느낀 최종적인 감상은,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을 보여준 연극이라는 것이다. 이야기 속 어느 캐릭터가 언급하는 또 다른 이야기 속 인물도 아니고, 누구는 그랬다더라라고 전해 듣는 이야기 속 인물도 아니고, 어떤 걸 상징하고 주장하고 선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을 목격하게 만드는 연극.

&#160; 사람이란, 완벽하지도 않고 그렇게 이성적이지도 않으니까. 어떤 건 별 이유 없이 그렇게 해버리기도 하고, 내 마음과 다르게 해버리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 불규칙하고 종잡을 수 없는 걸음 속에서 그래도 어떤 것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서로 상처입히지 않기 위해서 배려하기도 하고. 이미 상처입은 사람에게 우물쭈물 다가가 말도 안 되는 아무 소리를 하기도 하고, 누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걸 듣고선 그냥 한숨 한 번 푹 쉬고, 야, 됐어 가자&#160;한 마디와 함께 그냥 다시 손을 잡아버리기도 하고.

&#160; 에이미는 가련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어쩌다가 임신을 하게 됐지만 거기서 생겨나는 절망과 좌절에 매몰되어 바닥을 기다가 파멸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했고 그래서 임신을 지속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그러면서도 ''그거''가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있을지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이게 단지 ''그거''라고 불릴 수 있는 ''그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뿌리치기도 하는 복잡한, 모든 사람이 때로 그러한 만큼 복잡한 사람이다. 시간은 고민을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고민을 끝내기 전에 선택부터 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을 돕고 함께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분히 대화하면 좋았겠지만 오해도 짜증도 심술도 분노도 순간순간 생겨나는 것이니까, 그만 후회할 일을 해버렸고 그러고선 잘 사과하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서로의 그 눈빛과 동작들 속에서 화해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고... 그렇게 또 삶을 겪어내는 한 사람. 그게 에이미이다.

&#160; 에이미를 내버려둔 사회, 어른들. 하지만&#160;에이미 곁에는 에이미를 진심으로 위하는 에스터가 있다. 비록 고등학교에서처럼 언제나 함께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에이미가 또 다른 시련의 길로 빠지거나 혹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헤어짐에 많이 슬퍼하겠지만. 에이미는 사람이야.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사람의 삶은, 우리의 삶은 해피엔드로 끝날까 새드엔드로 끝날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에이미는 정해진 대로 살아오지 않은 만큼이나 앞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길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에스터를 만나게 될 수도 있고.

&#160; 마지막에, 에이미는 수영 연습을 하러 들어가는 에스터에게 "사실 나..."라고 무언가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다른 친구가 들어오고 둘의 대화는 끊겨버린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떨어지는 게 두렵다는 이야기? 고맙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무슨 말이든 했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그게 막 엄청 안타깝진 않았다. 다들 그러니까.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단 말을 고마운 만큼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멀리 떠나가는 사람을 모두 다 붙잡는 데 성공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있을까?&#160;그냥 살아가다보면 흔히들 일어나는 일이니까. 슬프고 안타까운, 그렇지만 일어나곤 하는 일들.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끝장내는 족쇄가 되기보단 &#160;평생의 짐이 되는 일들.

&#160; 임신중절이라는 소재도 그렇다. 사실 지금까진 임신중절, 그러니까 ‘낙태’라는 소재가 이야기에 등장할 때면, 임신중절은&#160;여자의 일생에 따라다니는 낙인이고 족쇄,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흉, 트라우마의 원인으로 자주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마른대지는, 어쨌거나 이런 일을 겪은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는 사람이고 또 이러한 일도 사람의 일생에서&#160;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란 걸 깨우친다. 임신중절은 우리 인생에 있을 수 있는 수많은 비극, 가까운 이의 죽음이나 커다란 사업적 실패, 모자란 재능에 대한 좌절 같은 커다란 일부터 길을 가다 넘어지고 아끼는 옷에 더러운 물이 드는 자그마한 비극들을 모아놓은 그 리스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은 한 사람의 삶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또 좋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에 힘입어 이겨내기도 하고, 아니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드렁하게 넘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임신중절만큼은 이러한 가능성의 좌표 공간&#160;안에 있는 게 아니라 마치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무조건 반드시 틀림없이 그 사람의 일생이&#160;지옥으로 파멸로 극단으로 치달을 거라는 생각을, 많은 이야기꾼들이, 나조차도 너무 쉽게 해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

&#160; 최근 시대의 흐름이 그러한 때문도 있겠지만, 스페셜 딜리버리에서 느꼈던 것처럼&#160;마른대지도 쉽게 다뤄지지 않았던 소재를 잘 풀어낸 작품이라서 참 좋았다. 스페셜 딜리버리가 여성의 선택에 대한 존중과 그 선택이 진정한 선택이 되기 위해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극이라면, 마른대지는 어른들,&#160;사회가&#160;내버려두건 어쨌건 선택은 이루어지고 그 선택 후에도 삶은 이어진다는 것, 도움을 요청하고 때론 다투며 때론 서로 손잡아가며 사람은&#160;살아간다는 걸 보여주는 극이라고 느꼈다. 극 소개에서 나오는 것처럼 ''주체적으로 삶을 사는 여성''을 보여주는데, 이게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인물은 과연 어떤/무엇을 하는&#160;인물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그래서 그 주체적인 여성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160;어떻게 삶을 살아가는가에 집중한 극.

&#160; 살아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까지 제대로 주목받으며 등장한 적이 없었던 부류의 사람이었기에 의미가 있는 극인 것 같다.

&#160; 어쩌면, 내가 연극을 보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이거인 것 같다. 다르면서 다르지 않은, 어떤 면에선 흔한 듯하면서도 어떤 면에서 고유한 어떤 삶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이것 또한 삶이구나,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알게 해주기 때문에.

최고예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