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아름답고도 진한 감동의 시를 읽고 왔습니다.

여운이 남는 연극이었습니다

"13월의 길목" (작:최창근 연출:구태환 출연:김승철, 박현미, 김정은, 이요성, 황세원, 이서림, 조하영, 박정길, 노상원, 최성식 제작:극단 秀 극장:게릴라극장 별점:★★★★☆) 무대의 모습은 12월의 어느 카페이다. 카페주인과 연관된 사람들이 연말 모임을 하기위해 방문한다. 각자의 사연을 얘기하면서 공연은 진행된다. 문학, 연극, 사진, 음악등의 얘기이다. 거기에 사랑의 감정에 대한 얘기가 빠질 수 없다. 그런데, 남자 2명이 등장하며 이 카페가 없어진 걸로 전개된다. 그럼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사람들인가? 아무튼 좀 헷갈린다. 공연은 배우들이 2명씩 퇴장하며 끝난다. 옛날에 보았던 "밑바닥에서" 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는군... 12월에 보면 더 좋았을것 같다.

좋았습니다

''13월의 길목''은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주인공 선재가 차린 까페의 이름이다. 과거부터의 인연이 닿아서, 또는 이 까페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서 서로 연결된 사람들이 연말 파티를 위하여 모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각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는 것들, 춤, 시 낭송, 기타 연주, 사진 촬영, 연기 등등을 보여주며 즐거운 파티를 만들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각자의 느낌과 생각, 엉켜있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낸다는 이야기이다.

내용만 보면 요즘의 주요 경향 중 하나인 ''치유''라는 것과 닿아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자신이 상처 받은 이야기나 과거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한다거나 어떻게 메워보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저 그럴만한 타이밍이 되었거나 누군가가 꺼내는 바람에 자신의 이야기도 하게 되었을 뿐, 굳이 그것을 치유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만한 동기도 갖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13월의 길목''에서 각자 꺼내는 이야기는 그냥 파티 중에 대화를 이어 나가거나 누군가에게 지금의 심정을 전하기 위한 용도인 것이다. 그래서 작품이 끝나갈 때까지 그들의 고민이나 엉켜있는 사례 중 어느 것 하나 해결되었다라고 할만한 것도 없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부분이 이 연극의 결정적인 매력이 아니었나 싶다. 고민이나 걱정거리를 어떻게든 연결하고 해결하여 했다면, 물론 그 인물이야 만족하였겠지만, 과연 그게 이렇게 울림을 남길 수 있었을까. 무대를 벗어난 바깥 세상에서 그런 고민들은 대체로 해결되지 않고 뭉개지거나 터지거나 그냥 넘어가기 마련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남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도 희망을 갖는다는게 요즘의 대세라고 하더라도, 차라리 나는 그냥 남들 역시 비슷한 고민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에 더 공감이 간다. 그래서 ''13월의 길목''처럼 그냥 드러내기만 하는 연극이 더 좋은 인상을 남겨주는 것이다. 은근하게 짝사랑하였던 남자가 자기 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호의를 베풀며 같이 노래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실의 표정과 눈물이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가실의 그런 고민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딱 그 지점에서 멈췄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가실과 수현의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면... 글쎄, 결말은 깔끔하게 나왔겠지만, 과연 그 이상의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선재와 난주, 동호 사이의 관계나, 위태위태하게 보였던 동호의 말투와 냉소적인 행동들이 그 이상의 사건으로 번져가지 않았던 것들,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의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의 결말은 그다지 무대에 어울리지도 않았고, 적절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많은 사람들이 작고 큰 인연으로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작품에서 갑자기 왠 판타지스러운 설정과 결말이란 말인가... (스포일러) 결국 그들은 모두 이승에 미련을 두고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이었던 셈인거 같은데... 그런 미련을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함으로써 훌훌 저승으로 간다는 내용으로 이해하면 되는건가? (스포일러 끝) 그 전까지 그런 복선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갑작스런 분위기 전환을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굳이 왜 그래야했을까. 그냥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각자의 삶을 계속 이어가는, 극장 바깥의 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엮으면 안되는 것이었나... 이 작품이 강한 반전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 판타스틱 장르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그냥 암전되기 직전까지의 작품만을 기억에 남기고 싶고, 그러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105분의 공연시간 중 앞의 95분과 뒤의 10분이 참 다른 연극이었지만, 분명 95분의 무대는 매우 인상적이고 울림이 있는 작품이었다.
이런 좋은 작품에는 역시 좋은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함께 하는 법, 배우들끼리 주고받는 빠른 호흡의 대사들이 꽤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연기한 기실 역의 조하영 씨는 앞으로도 무대를 챙겨 봐야할 것 같은 느낌을 오랜만에 주는 배우였다.

그나저나 궁금해진 점 하나...
이번 연극 보면서 객석에서 무척 크게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는데, 하필 그 때가 꽤 조용하게 진중한 대사를 이어가던 순간이었다. 물론 관객이 보기에는 큰 동요 없이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정말 배우들은 감정을 그대로 이어가는데 문제가 없었을까? 이런거 뒷이야기 취재한 기사나 좀 찾아봐야겠다. ㅎㅎ

* 기록...
선재 - 김정은, 난주 - 이서림, 가실 - 조하영, 수현 - 박정길, 인화 - 박현미, 영수 - 김승철, 정희 - 황세원, 동호 - 이요성, 남자들 - 노상원, 최성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