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해주는 독특한 다방이 있다. ‘흑백다방’이라고
70-80년대 분위기로 꾸며 놓았다.
따르릉 유선 전화기, LP레코드 판, 다방커피~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손님이 들어온다.
이 손님 때문에 멀쩡하고 신사적으로 보이는 주인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두사람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아 보는 관객도 조금은 힘든 순간이 지나간다. 처음에는...
그러다 손님이 정체를 밝힌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두사람은 비극적인 경험을 공유했다. 아니 가해자와 피해자다.
그 피해자가 지금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 온 것이다.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문학장르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흑백다방은 새롭게 접근해서 풀어가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배우의 연기에 기대야 하는 공연이고, 그 기대는 충족되었다.
시각 장애의 피해자에 맞춰 공연 내내 다방의 음악소리를 들리지 않아다. 판만 돌아가고..음악소리는 나지 않았던 것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크게 크게 소리쳐야하는 다방주인의 노래에 이어
노고지리의 ‘찻잔’이 마지막엔 음악이 나오니 더욱 깊은 감동이었다.

공연장에 들어가니 counsellor 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어요. 전제이면서 줄거리로 포함되어 있는 상담을 해주는 다방에서 그의 위치와 역할이 드러나는 느낌이었어요. 누군가의 고민과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상담전문가. 이런 여러 가지 유사한 뜻이 인터넷에 올라 있어요. 여러 말들이 있지만 주목해야 할 말은 “그의 고민, 즉 말을 듣는다”인 것 같아요. 내담자의 말, 어쩔 때는 그 말도 안되는 말들을 열린 마음으로 듣고 있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나서야 공감, 지지, 합리적인 선택, 방향의 제시가 가능합니다. 지루하고 지난한 작업이고 그의 말투와 격정, 분노와 억울함에 휘둘리기 쉬운 과정이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그가 하려는 진짜 말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무대는 그렇게 내담자를 기다리는 상담자에서 시작합니다.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한공간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그 안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고, 상담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비추어서 내담자에게 생각과 반성,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기를 제시할 거에요. 그 길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무대의 공간은 그것만으로도 천천히 내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상담자가 자기 부인의 기일에도 불구하고 내담자인 자신의 끈질긴 상담요청을 받아들여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욱더 진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그 상황에서 갖게 되는 상담자에 대한 신뢰감, 고마움 등은 분명히 내담자가 마음을 여는 친밀감, 라포를 형성하는 도구가 될테니까요.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내담자를 기다리는 상담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따르릉 따르릉~ 그리고 내담자가 자기가 어디쯤 있다고 전화를 해서 상담자가 친절하게 찾아오는 길을 알려주려고 하지만 자기가 할 말만 딱 하고 뚝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상담자는 그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할 말만 딱하고 끊을 거면 왜 전화를 한 걸까요? 어쩌면 상담자는 오늘의 상담이 결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자신에게 내밀어진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담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상담실인 그 흑백다방으로 들어오는지 모르는 채로 그렇게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극 흑백다방은 영화 박하사탕의 장면과 인물들을 무대로 물러온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상처받은 인간군상들의 이야기,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었지만 가해자라고 원해서 한 일이 아닌 역사의 현장들, 그 강압과 압제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방황하고, 그러면서도 생존을 위해서 저질렀던 잘못들이 박하사탕에서 설경구 배우가 토해낸 것처럼 “나 돌아갈래”라는 말처럼, 돌아가서 고칠 수만 있으면 두 사람 모두 고치고 싶은 그 회한들을 무대 위에서 풀어냅니다. 그건 참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만 무대 위에서 관객이라는 상담자 앞에서 두 사람의 배우가 내담자가 되어서 자기 마음을, 그때 그 상황을, 복수를 바라는 마음을,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소중한 무언가를 가져와 충격을 주기도 하면서 쏟아놓습니다. 한을 저 가슴 안쪽에 꾹꾹 눌러서 담아놓고 있다가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무대를 쌓아온 한과 살고자 하는 욕망을 풀어냅니다. 그렇게 풀어내는 작업, 이게 바로 흑백다방의 카운슬링이고, 까만커피에 하얀 설탕이 녹아들어가 맛있는 커피를 만든다는 다방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70분간의 무대를 바라보면서 소통이 사람을 살린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통의 시작이 말인 것과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슬렸던 첫 번째 통화에서 그가 그렇게 자기 할말만 하고서는 전화를 끊어야 했던 사정이 밝혀질 때는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오랜 시간 묵혀왔던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을 관객으로 바라보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풀지 못한 이야기를 쌓아두고 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시대와 개인, 가해자와 피해자, 미안함과 용서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무대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통의 연극, 흑백다방은 나에게 생각의 거리를 깊숙이 던져 넣었던 그런 연극이었습니다.

두명의 배우만으로 무대를 꽉 채우는 연극이에요 3번째 관람인데도 최고네요

서울 삼성동 근처에 공연장이 있다는 건 이번 기회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탄천과 가까운 곳에 백암아트홀이 위치하고 있어요. 1시간 일찍 도착해 티켓을 배부받고,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극찬한 공연을 시리즈로 기획해서 하는 것 같았어요. 흑백다방 외에 아직 못 본 공연들인데 기회되면 한 번 관람해보고 싶네요. 이황의, 윤상호 배우의 2인극으로 진행됩니다. 작년 혹은 재작년에 대학로에서는 이황의 배우 대신 정성호 배우가 심리 상담 겸 전 형사 역할로 나왔었는데, 두 분 다 경력이 있어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윤상호 배우의 말 더듬는 연기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대단해보였습니다. 스포가 될까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해외 진출 등을 고려한 공연이라 그런지 배경 뒷 편에는 계속 영어 자막이 흘러나왔습니다. 외국에도 이러한 수작이 널리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흑백다방. 건조해 보이는 제목처럼 조용하게 아니 어찌보면 지나치게 정적이다 싶게 시작된 이 연극. 시간이 흘러 카운슬러와 내담자가 사실 군사정권 시절 가해자인 경찰과 피해자인 학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이후 그 시대를 살아간 우리 모두가 피해자였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 검은 커피와 하얀 설탕이 합쳐져야 조화로운 맛의 커피가 되듯이 우리도 흑백 양쪽 진영으로 편가르지 말고 이제 힘을 합쳐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