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께서 서울에 놀러오신다고 하셔서, 좋은 공연장에서 음악 감상하면 좋아하실 것 같아 예약했습니다. 지루하면 어쩌나 걱정도 좀 했었는데, 언제 시간이 다 갔나 모를만큼 즐겁게 음악 감상했습니다. 악기 연주하시는 분들의 진지한 눈빛이 정말 멋있었고, 열정적인 지휘도 좋았습니다. 그 분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지루할틈 없이 밀도있게 아름다워서, 순간순간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감상했습니다. 클래식을 즐기는 고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도 좋았어요ㅎㅎ 엄마도 저랑 비슷한 마음으로 즐겁게 감상하신 듯 해서 기뻤습니다. 공연장을 나와서 조금 쌀쌀한 밤공기를 감상에 찬 채로 맞았던 기억이 오래 남을 것 같아요.
단지, 지휘자가 바뀌었다는 얘기에 바뀐 지휘자 분은 어떤 지휘자 분이었나 찾아봤었는데, 바뀐 지휘자 분이 성희롱 파문에 휘말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돼 그게 연주 전에도, 중에도 후에도 찝찝한 마음으로 남아있어요...ㅠㅠ 연주를 정말 즐겁게 듣다가도 아 근데 저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지휘하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구나ㅠㅠ 하는 기분이 들고... 그래서 별점 하나를 깎습니다ㅠㅠ

11월 3일에는 롯데 콘서트 홀에서 열린 Charles Dutoit 지휘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 연주회를 다녀왔다. 사실 이 오케스트라의 공식 명칭은 러시아 공훈 단체 아카데미 심포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Заслуженный оркестр России академический симфонический оркестр филармонии)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명칭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필하모니에는 두개의 오케스트라가 상주하고 있다. 하나가 유리 테미르카노프(Юрий Темирканов)가 예술 감독이면서 상임 지휘자로 있는 이번에 연주한 오케스트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프(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가 지휘자로 있는 아카데미 심포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이다. 그러니까 테미르카노프가 맡은 오케스트라에 비해 러시아 공훈 단체라는 말이 빠진 오케스트라이다.
이번에 테미르카노프가 지휘를 하게 되어 있었으나 82세 된 자신의 형이자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보리스 하투예비치 테미르카노프가 10월 26일에 사망하여 테미르카노프 대신에 뒤투와가 지휘를 하게 되었다.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79세이다.
롯데 콘서트 홀은 개관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이제 처음 방문하여 늦은 감이 있었다. 고층 건물 속 음악 연주장이라서 음질이 어떨지 우려가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처음 복도를 지나 객석으로 들어가니 Los Angeles Philamonie의 Walt Disney Hall에 갔을 때가 생각이 났다. 월트 디즈니 홀도 무대를 객석이 둘러싼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롯데 콘서트 홀도 그런 개념이었다. 그러고 보니 Berliner Philharmoniker도 객석이 무대를 둘러싼 구조라는 것이 생각났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좋긴 한데, 공연이 시작되고 나니 한가지 우려가 생겼다. 필자는 P석의 앞에서 두번째 열에 앉았는데 악기 소리가 너무 크고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예술의 전당 합창석에 앉은 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공연장에서 연주하려는 단체는 자신의 연주실력에 대해 확신이 있고 검증된 오케스트라만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자와 무대가 너무 가깝고 음향이 뛰어나서 조그만한 실수도 바로 관객의 귀에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필자의 이런 우려를 바로 불식시키면서 끝까지 세계 정상급다운 연주 실력을 보여 주었다.
첫번째 곡은 Rossini의 오페라 Il barbiere di Siviglia 서곡이었다. Beaumarchais의 원작 희곡을 희극적인 오페라로 만든 로시니의 그 분위기를 잘 살려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는 밝은 분위기로 잘 연주하였다. P석의 앞에서 두번째 열에 앉으니 장점이 있었는데 악기 소리 하나 하나가 어느 쪽에서 들리는지 잘 눈에 띄었고, 지휘자의 지휘 모습이 잘 보이는 것도 장점이었다. 다만 관악기가 독주 부분으로 들어갈 때는 그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면서 오케스트라 전체의 균형이 깨진다는 느낌이 들고, 현악기의 소리가 상대적으로 묻히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좌석의 특성상 어쩔수는 없었던 것 같다. 또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의 악기 배치는 통상적 오케스트라 배치와는 좀 다르다. 보통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지휘자 우편에 가 있지만 러시아에서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는 첼로를 지휘자 좌편에 배치하고 지휘자와 가까운 앞쪽에 둔다. 콘트라베이스는 물론 첼로의 뒤편에 있다. 그리고 필자가 금관악기와 가까운 쪽에 앉아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현악기 소리가 작게 들렸다. 물론 현악기와 관악기가 같이 나올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두번째 곡은 Beethoven의 Piano concerto No.5 Eb Major Op.73 “Kaiser”였다. 협연자인 Andras Schiff의 연주는 실황으로는 처음 들어 보았는데, 격렬한 분위기의 베토벤은 아니었고 절제되었으면서도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영롱하지만 가볍지는 않은 분위기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1악장 제시부의 카덴차에서 쉬프의 연주는 힘차기는 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뭔가 절제된 느낌의 연주였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제시부의 1주제와 2주제를 번갈아가면서 조화롭고도 힘차게 잘 들려주었다.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휴지부가 있었는데 관객들의 박수와 헛기침이 쉬프가 연주에 집중하는데 방해를 주지 않았나 싶었다. 왜냐하면 1악장의 Allegro 연주에 비해 2악장은 Adagio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쉬프는 손을 모으고 그 분위기를 살리려고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악장에서는 매우 절제된 피아노의 연주를 통해서 1악장과는 완전히 대비된 분위기를 들려주었다. 1악장이 위풍당당한 황제의 모습이라면 2악장은 고뇌에 찬 철학자의 모습 같았다.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는 여유를 두며 연주하면서 3악장의 시작과 긴장감을 잘 암시해 주었다. 3악장 시작하자마자 Allegro로 진행되며 강력하고 경쾌한 피아노의 타건이 계속되었고, 오케스트라도 이에 못지 않게 강력한 Forte를 들려주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는 전반적으로 협연자의 피아노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소리를 균형있게 잘 들려주었다.
3번째 곡인 무소르그스키(Мусоргский)의 전람회의 그림(Картины с выставки)에서는 러시아 음악의 야성미와 그림을 감상하는 도중 움직이는 분위기가 잘 전달되었다. 무소르그스키가 친구인 가르트만(Гартман, 보통 러시아어의 g소리가 영어로는 h음으로 바뀌어 표기되는 관계로 영어로는 Hartman이라고 표기됨)의 유작 전시회를 보고 느낀 감흥을 피아노 곡으로 작곡한 것인데, 현재는 Ravel의 관현악 편곡도 많이 연주되고 있다.
첫번째 Promenade에서 금관악기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혹시 관악기 연주자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이 있었지만 그것은 역시 우려일 뿐이었다. 러시아 관악기 주자들의 안정된 연주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어지는 Gnomus의 연주에서는 난쟁이들의 기괴한 분위기가 잘 전달되었다. 잘 안쓰이는 타악기들의 적절한 배치가 무소르그스키 작곡의 천재성을 잘 보여주었다. 두번째 Promenade 뒤에 Il vecchio castello에서는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역사가 깊은 이탈리아의 고성 앞에서 노래하는 음유시인의 분위기가 구슬픈 관악기의 소리를 통해잘 전달되었다. 세번째 Promenade 뒤에 Paris Tuileries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가벼운 분위기로 관악기들에 의해 잘 표현되었다. 뒤이은 Bydlo에서는 폴란드 소무리의 무거운 발걸음이 심각하고도 장중하게 현악기들의 Fortissimo 연주로 잘 묘사되었다. 팀파니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연주는 압권이었다. 네번째 Promenade의 무거운 발걸음 뒤에 나오는 Балет невылупившихся птенцов(알에서 깨지 않은 새끼들의 발레)에서는 알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새끼의 가벼운 발걸음을 그린 발레 음악이 관악기들에 의해 대조적으로 잘 연주되었다. 뒤이어 Samuel Goldenberg und Schmuyle에서는 두 명의 폴란드 유태인이 등장하는데, 부유한 Goldenberg의 오만한 말은 현악기로, 가난한 Schmuyle의 위축된 말은 관악기로 실감나고도 절묘하게 오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표현되었다. 신약성경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섯번째 Promenade 뒤에 Limoges. Le marché에서는 프랑스의 한적한 마을 시장에서의 여자들의 수다스러운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그다음 Catacombae. Cum mortis에서는 파리에 있는 카타콤의 어둡고 음울하며 무서운 분위기 속에 가르트만이 등불을 한 손에 들고 안내자로 지나가는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관악기의 불협화음적인 진행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고, 갑작스런 오케스트라의 찢어질듯한 음이 그런 분위기를 잘 전달하였다. 뒤이은 Избушка на курьих ножках, Баба-Яга (닭다리 위의 집, 바바 야가)에서는 러시아의 민속적인 내용이 야만적으로 잘 연주되었다. 바바 야가는 러시아 설화에 나오는 노파인데 젊은 여자로 모습을 바꾸어서 젊은 남자를 유혹하여 집안으로 끌어들인뒤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바뀌어 남자를 잡아먹는 인물이다. 닭다리 위의 집은 바바 야가가 사는 집이다. 바바 야가는 절구통이나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데, 곡의 처음에 바바 야가가 이런 활동을 하는 모습이 급격하게 각을 지며 3도씩 내려오는 현악기의 연주로 잘 표현되었다. 중간부에는 젊은 남자를 노리기 위해 숨어서 일을 꾸미는 바바 야가의 모습이 긴장감 있는 현악기의 Pianissimo 연주로 잘 표현되었다. 마지막 Богатырские ворота에서는 지금까지의 연주를 총결산한다. 1866년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II에 대한 암살 미수가 있었다. 황제의 목숨이 구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러시아의 키예프(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에 대문을 건설하는 프로젝트 공모가 있었는데, 거기게 가르트만이 지원하여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대문의 웅장한 계획을 무소그르스키가 잘 표현하였고, 중간에 보면 러시아 정교회의 종소리가 들린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가 끝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이 곡을 잘 연주하였다.
앙코르로 나온 곡은 글린카(Глинка)의 오페라 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이다. 한국에서는 이곡의 공연시간이 4시간이나 되서 잘 공연되지 않지만 러시아에서는 종종 무대에 올려진다. 필자는 이전에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 오페라를 본적이 있다. Presto로 연주되는 이 곡을 통해서 왜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가 우수한 연주단체인지가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다만 Dutoit가 지휘를 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는데 관악기와 현악기의 연주속도가 0.5초 정도 차이가 나면서 약간 불일치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휘자가 성추문이 있는 것은 문제긴 하지만 지휘 실력 하나는 여전히 우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러시아 측에서 성추문과 지휘는 별도로 생각 했기에 그를 테미르카노프의 대타로 부른 것은 아닌가 싶다.
이번 여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마린스키 극장 I, II에서 발레와 오페라를 각각 보았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가 여름 시즌 문을 닫아서 아쉽게 못 보았는데 그 아쉬움을 이번 공연을 통해서 잘 날려버릴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