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에 턱 하니 박혀있는 '19세미만 관람불가'라는 등급표시와 '명품성인연극'이라는 부제는 이 연극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류에 속하는 그렇고 그런 성인연극이 아닌가 싶은 의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작가와 연출가가 '왕의 남자'의 원작인 '爾'를 썼던 김태웅 씨라는 것을 알고나니, 최소한 시각과 청각의 말초적인 자극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연극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 생기기도 했었다. 과연 이 연극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논쟁'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약간은 호기심이기도 한 기대를 가지고 극장에 들어갔다.
우선, 분명히 성인연극인 것은 맞다.
상당히 강한 수위의 몸짓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상당히 보기 거북한 수준의 춤이 난데없이 무대 위를 장식했다. 조명이 적절할 시점에 꺼지면서 남자배우든 여자배우든 실제로 노출하는 경우까지는 거의 없었지만, 마지막 즈음에 여배우의 등 전체 노출이 있기도 했다. 이런 노출뿐만 아니라 이왕 19금으로 만들었으니 제대로 써보자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여태까지의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던 수준의 강한 욕들이 꽤 오랜 시간 난무하기도 했다. 과거 SNL에서 김슬기가 보여주었던 찰진 욕 정도가 아니라, 분노한 상태에서 마구 내뱉어내는 욕설이었으니 수준이 상당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욕을 육성으로 들을 일은 공연 관람 중에서든 실생활에서든 없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과거 보았던 다른 성인연극들과는 달리, 연극 '헤르메스'에서 보여준 19금스러운 대사와 몸짓과 행동들 대부분은 이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세지와 맞닿아있었고, 극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벗어나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어떤 연극은 내내 배우들의 벗은 몸과 야한 대사에만 집중하다 마지막에서야 마치 깜빡했다는 듯 급하게 '주제'를 배우의 입으로 노골적으로 던져주면서 마치 원래 애초부터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구는데, 연극 '헤르메스'는 배우들의 몸과 욕이 포함된 대사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모두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남건이라는 인물의 변화나 갈등을 표현하는 수준, 노출과 대사는 딱 이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춰준다. 그래서 '논쟁'이 그러했듯, 분명히 야한 몸짓이고 거북한 정도의 욕설이고 행동들이 반복되지만 그 자체로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연극이다.
그럼... 이 연극이 보여주려고 하는 메세지, 주제는 무엇일까.
한 때 열혈 운동권이었고 아마 졸업 후에도 노동운동에 어느 정도 투신했었던 것 같은 남건은 성인연극을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호텔 최상층의 스위트룸에서 생활할 정도로 큰 돈을 벌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거둔 성공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과 함께 공연하는 여자 배우를 '착취'하고, 어렵게 찾아온 운동 시절의 선배를 박대하고, 여배우의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계속하기 위하여 새로운 여자를 감언이설로 캐스팅하여 연극에 올린다. 이왕 그렇게 변신할 것, 차라리 과거의 생각 따위 다 버리고 죄책감이나 미안함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건은 겉으로는 남동생이 죽은 여배우가 공연에 올라가지 않는 것을 두고 프로 배우가 아니라고 비난하고 가족을 건사하지 못하는 선배를 힐난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천박하고 당당하지 못한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더러운 행위라고 할 수 있는 '배설'을 자신의 몸에 해달라는 요청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것이고, 호텔 바로 아래서 벌어지는 촛불집회를 애써 외면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어차피 천박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천박한 수준의 자본주의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결국에는 그나마 자신의 돈에 굴복하지 않으려했던 안마사와 함께 있을 때 모두 토로해버리고 만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다시 합리화시키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이 자본주의의 가장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몸'을 파는 연극을 만들어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 그런 시도가 충분히 성공을 거두고 여전히 자신의 뜻을 지키려하는 사람들조차 그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 돈으로 자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들의 모든 것(몸이든 배설물이든)을 사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돈을 거절하려했던 유일한 인물인 안마사 마저 급한 처지에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만다. 모든 사람과 행동과 내용이 자본의 통제 하에 들어가고, 그 자본을 가진 사람마저 돈의 맛과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 바로 연극 '헤르메스' 안에 있다. 그런 경계선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치 이 작품에서 남건의 선배 전상국과 여배우 유가인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죽음 밖에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고보면 이 작품은 정말 잔인한 현실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역시 이 작품이 큰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내내 극을 이끈 주인공 남건을 연기한 김영필 씨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극장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면서도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냥 귀에 콕콕 박히도록 하는 그 또렷한 목소리와 발음, 때로는 천박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야하게 다양한 상황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연기력, 그리고 이런 모습을 공연 시간 내내 유지해내는 체력. 왜 이 배우를 이제서야 처음 공연에서 보았을까싶어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였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시간이 짧았지만, 그만큼 더 큰 인상을 남긴 전상국 역의 김문성 씨... 그 전설의 작품 '슈샤인 보이'에서도 인상을 남겼던 그 배우더라. 역시 클래스가 있는 분들은 어느 작품에서도 족적을 남길 수 있나보다.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신념과 생활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뭉클하기까지 했다.
꽤 좋은 기억을 남을 작품이긴 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였던 야사시하게 차려입은 남자의 야샤시한 춤 장면... 그런 장면이 등장해야하는 개연성도 없었고, 그렇게 섹시하거나 흥미로운 춤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이 때 사용한 조명과 음악이 매우 촌스러워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너무나도 맞지 않았다. 내가 다른 극장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황당한 장면이었다. 도대체 이 부분이 들어간 이유가 뭐지? 딱히 옷을 갈아입거나 장면을 전환해야하는 부분도 아니었는데...
또 한 가지, 극 내에서 남건이 자신의 연극을 홍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다양한 수단들은 실제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여러 성인연극들이 사용했던 방법들이기도 하다. 관객이 무대로 난입한다던가, 배우의 동생이 공연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았다던가 하는 기사들, 드문드문 잊을만하면 무슨 사건이 터졌다면서 보도자료를 뿌리는 그 연극들 말이다.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그 기사들이 나왔을 것을 생각하니, 언론이나 연극이나 결국 자본의 판 안에서 잘들 놀고 있구나 싶었다.
* 기록...
남건 - 김영필, 유정숙(안마사) - 강말금, 유가인(배우) - 이안나, 김성미(신인) - 김보희, 전상국&무대감독 - 김문성. 작/연출 - 김태웅.
성인연극이라 부르지마라, 헤르메스...
눈내리는 2월 휘과장은
헤르메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상업과 교역의 신이다. 제우스(Zeus)와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Maia)의 아들로 지혜롭고, 신속하며, 임기응변에 강하다 알려져있다. 밑바닥 인생들 연극 헤르메스에는 남건을 포함해 밑바닥 인생들이 즐비하다 성인연극배우 가인은 부모를 잃고 동생과 둘이 산다. 매일 자신의 알몸을 팔아 월 5백을 받는다. 출장 안마사, 성미...그녀는 엄마의 엄청난 병원비 때문에 젊은 나이에 길거리 여성이 되어 자신의 꿈조차 접고 산다. 남건의 직장 선배였던 상국 또한 오랜 노동투쟁으로 경제력을 잃고 자신의 콩팥마저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 여기에 굳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 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맹인안마사 정숙까지... 이들의 사연만 듣고 있어도 왠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람은 배설을 해야 한다. 배가 더부룩하고 답답할 때는 '똥'을 누면 된다. 그런데 가슴이 꽉 눌린 것 같고 답답할 때는 어찌해야 할지... 맹인안마사 정숙은 세상으로부터의 멸시를 고상한 시로, 몸을 파는 출장안마사 성미는 세상에 대한 욕과 돈으로, 배우 가인은 끊지 못하는 담배로 굴욕을 배설한다.
모두가 나름의 방법을 찾았지만 주인공 남건은 적당한 배설수단을 찾지 못한다. 욕도 해보고 돈도 모아보고
명품위스키에 호화로운 호텔생활도 해보지만 배설이 안된다 답답함이 가슴에 차 더부룩하기만 하다. 자본의 시대, 똥으로 세례를 받다. 천주교도들은 마음의 고민을 고해성사로 풀어논다. 절에 다니는 분들은 마음의 업보를 백팔배로 다 잡는다. 중세때는 돈으로 지은 죄에 대한 면죄부도 샀다고 한다. 남건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물로 세례를 받듯이 똥으로 세례받고 마음의 안식을 찾늗다. 자본의 화신, 비즈니스의 화신...헤르메스로 거듭나려는 순간이다. 자기합리화, "흥, 저까짓 시어빠진 포도를 내가 먹나 봐라" 남건은 더럽고 추악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거다. 돈에 길들여져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을 변절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를 돈뭉치로 생각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이 사회에서는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합리화한다.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에 등장하는 여우처럼 "어차피 똥을 묻히고 사는 놈이데 좀 더럽게 살아도 되는 거 아냐" 라며 그렇게 남건은 자신을 위무하고 자위하는 것이다. <헤르메스> 어두운 골방에서 광장으로 연극을 보면 극의 공간이 시청광장 앞 프라자호텔 느낌이다. 창문만 열면 촛불집회자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니까... 실제 촛불집회가 잔디광장에 있을 때, 과연 프라자 호텔에 묵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의 밀실, 자신의 방에서 편안함을 즐기고 싶은데 방해 받기 싫었을 것이다.
갑자기 자신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며 밀실에서 꼼꼼하게 재테크에 열심히셨던 어떤 분이 떠오른다. 수 십년전, 작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시대적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어찌 그리 똑같은 지...
돈(자본)이 도덕을 만들고, 만들어진 도덕이 훌륭한 가면이 되어 수단일 뿐인 돈이란 녀석을 삶의 목표, 목적이게 한다. 결국에는 가치가 되어 다시 도덕을 공고히 세상... 휘과장은 갑자기 한국을 떠나 제 3국행을 결정하고 싶어진다
극의 리얼리티를 더한다.
성인연극이라 오인하고 온 수많은 남성관객들이 후회하고 성토하고 했을테니까. 섹시미, 청순미, 귀요미까지 두루 갖춘 그녀... 간호사 코스프레 씬은 단연 압권이다. 끝으로 전상국과 무대감독역의 김문성님 구수한 사투리가 입에 착착 감긴다. 쉽지 않은 일인데 발성이 무척이나 좋다.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눈 내리는 겨울, 토요일 늦은 밤 대학로...가볍고도 무거운 연극 헤르메스때문에 또 한 번 행복해진다.
휘과장의 연극보기 더보기..
앗! 끝으로 이 연극을연출한 분은 바로 이 분...김태웅 연출가님.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 연극'이'를 연출하신 분이라는데왠지 고집스럽게 생기신 듯...^^ ....2014. 2. 8(토)...대학로 라온씨어터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