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평: 올해 본 연극 중 베스트 3 안에 든다 ! (지금까지는 사물의 안타까움성, 그와 그녀의 목요일 까지 해서 이렇게 3개. 김경주 작품은 시극이니까 열외)
데이빗 린시-아베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작가소개 어디선가 토니상 수상경력을 보고 믿음이 갔다. 상의 권위를 맹신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연극 파워블로거가 마찬가지로 토니상 수상작 연극 <레드>를 극찬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깨질 때까지 믿어보기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
입장하기 전 안내를 도와주시는 분이 스크린에 영상을 송출하니 그걸 감안해서 앉으라고 안내해주었다. 나는 막연하게 평범한 배경띄우기 용으로 스크린을 활용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게 웬걸~ 프로젝터는 영상을 한꺼번에 송출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그렸다. 붓으로 캔버스에 색을 칠하듯 빛으로 한 획 한 획 그어 클레어와 리처드가 사는 집을 지어냈다.
(출처 : 퍼디미어스 홈페이지 http://zeock.dreamartplay.com/%EA%B3%B5%EC%97%B0%EC%82%AC%EC%A7%844/)
왼쪽에 아리따우신 여성 분이 클레어, 오른쪽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성 분이 리처드, 가운데 반항기가 귀여움이 엿보이는 17세 소년은 부부의 아들 케니이다.
클레어가 일어나자 리처드가 그녀를 맞이한다. 그가 건넨 책에는 하루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정보들이 적혀 있다. 길에서 마주칠 만한 이들에 대한 정보, 클레어의 과거 사진 등등. 클레어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잠이 들면 리셋 돼버리는 기억 때문에 클레어는 매일매일 물어야 한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어쩌다 기억을 잃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리처드는 불편한 듯 회피한다. 그녀는 이상한 낌새를 예감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밝고 명랑하게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그런데 리처드가 목욕을 하러 간 사이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이 침입한다. 그리고 그는 클레어에게 자신이 그녀의 오빠라고, 리처드는 아주 못된 악질이니 자신이 구해주겠다고 하면서 클레어를 데리고 가려고 한다. 클레어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복면을 쓴 남자를 따라 나선다. 둘이 향하는 곳은 클레어의 엄마가 사는 시골집. 클레어는 복면사나이에게 복면을 벗을 것을 요청한다. 복면을 벗자 쭈글쭈글한 옆얼굴이 드러난다. 화상을 입은 듯 울퉁불퉁한 피부.
엄마 거티는 뇌졸중에 걸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두 글자짜리 단어의 경우 거꾸로 발음하는 패턴이 있어 ex 티파 - 파티 몇몇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패턴을 찾지 못해 그녀의 외계방언에 신나게 휘둘려야 했다. 슬픈 상황인데 이 외계방언 때문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던 아이러니...) 거티는 오빠 잭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클레어 혹은 거티가 냉장고에서 베이컨을 꺼내오는데 필립은 진저리를 치며 베이컨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다. 베이컨에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분홍색 인형.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꽤 거칠다. 인형의 이름은 힝키빙키, 인형의 입을 움직이는 이의 이름은 밀레. 그는 자아분열증이 있는 듯 밀레와 힝키빙키의 자아를 갖고 있다. 밀레는 잭의 친구다. 유일한 친구. 밀레의 흑역사는 꽤 참혹하다. 남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이 폭력의 기억 떄문인지 그는 지하실을 아주 무서워한다.
클레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리처드는 아들 케니와 함께 차를 몰고 나가려 한다. 엄마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엄마의 역할을 잘 못 해줘서인지 케니는 꽤 반항적이다. 아빠 앞에서 대놓고 대마초를 피우기도 하고, 욕도 서슴없이 한다. 하지만 리처드는 아들을 다그치지 않고 오히려 대마초 피는 아들을 혼내지 않는 아빠도 드물다며 자신의 관대함을 강조하려 든다. 부자가 클레어의 친정집/거티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과속으로 경찰에게 걸린다. 차 안에서 나는 대마초 냄새 때문에 경찰은 신분증 검사를 요구하는데 리처드는 매우 당황한다. 신분증 검사를 하게 되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과거에 저지른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루지 않아 아직까지 죄를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살고 있는 리처드. 경찰 하이디와의 몸싸움 끝에 총을 빼앗고 자신에게 대들었던 아들까지 위협한 끝에 셋은 동행하게 된다.
(스포일러 포함)
클레어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음악소리에 시달린다. 조각난 기억에서 오는 불협화음일까? 리처드와 케니가 집에 도착하고 집은 곧 아수라장이 된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실. 잭은 클레어의 오빠가 아니라 전 남편이었다. 케니는 잭의 아들이었다. 잭은 감정조절에 실패해 클레어를 무지막지하게 폭행하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아내를 개 패듯 패고 자는 남편에게 클레어는 끓는 베이컨 기름을 붓는다. 베이컨 냄새는 이때 당시의 극렬한 고통을 환기시키는 오브제가 된다.
우리 몸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정도가 있는 듯하다. 이 정도를 초과하게 되면 장애가 생긴다. 육체적 장애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치료나 사후대처가 용이하지만 정신적 장애는 쉽지 않다. 특히 기억과 고통의 관계, 트라우마의 존재, 정신적 외상을 뜻하는 트라우마는 기억의 촉수가 자신에게 닿지 않도록 방해한다. 이 방해는 자기장의 척력처럼 보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의식하기 어렵다. 트라우마는 의도된 망각을 통해 상처의 기억을 무의식에 보존한다. '시간이 해결해준다' 시간의 자연치유력/정화력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상처 앞에 우리는 아주 조금씩조금씩 다가가야 한다. 김기택 시인은 미당문학상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 몸 속 상처의 기억을 더 적극적으로 꺼내어 세상에 펴 말리고 싶습니다. 상처를 제 몸 속에 가두지 않고 세상과 접촉하고자 하는 의지는 상처의 현시를 통해 상처를 만들어낸 구조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상처의 윤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숭고한 지점이 있지만 이 마음의 근력과 지구력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제 마음과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이 상처를 받게 되면 제 안으로 숨게 된다. 상처의 원인과 치료방법을 모르니 더 이상의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웅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해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이성복 시인은 이런 아포리즘을 남겼다.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이 말은 상처를 세상에 펴 말리고 싶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야기라는 말의 형식. 처음부터 상처와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부담되고 고통스럽다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다가가는 법도 좋을 것이다. 대화치료와 예술치료는 서로 다른 운동방식으로 주체와 상처를 만나게 하고 화해시킨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조력자의 존재. 상처는 주관적 형식이다. 상처는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 상처라는 주관적 형식을 객관적으로 전환시키는 데 필요한 존재가 조력자, 상담자나 예술 매체일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이런 심리적 여유가 확보되었을 때 상처/고통은 사유가 불러오는 신선한 공기와의 마찰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폐쇄적 동굴에서 상처는 썩고 곪아터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서운 점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것 같은 고통에도 시간이 지나 적응을 '해버린'다는 것. 이 항상성에의 의지가 본질적 자아의 회복이 아닌 기형적 왜곡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적응된/무감각해진 이는 자각하기 힘들다. 딱딱하게 굳은 고름이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의 딱지가 아님을, 편안해진 공기가 자신의 감각체계의 마비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온전히 몸으로 고통을 살아버린 이의 이야기는 또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노망과 고통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연극 Puddy meers는 극중 뇌졸중에 걸려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티가 'Funny mirror'를 거티 발음식으로 옮긴 것이다. 때문에 영어사전에 검색해봐도 fail. 퍼디미어스를 보면서 든 생각은 아서 밀러나 유진 오닐의 전통적인 리얼리즘 가족 드라마의 스토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기억상실, 뇌종줄, 각자 사연이 있는 캐릭터, 반전 등의 장치를 통해 서사의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면서도 정교하게 조직해 관객들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기억을 점차 회복해나가고 기억의 퍼즐을 맞춰 진실의 상이 완성됐을 때 사건이 해결되는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1층/지하실이 공간의 분리와 리처드 - 클레어 - 잭 - 밀레 의 과거가 교묘하게 얽혀 있어 '추리'극적인 요소 때문에 뻔하지 않고 흥미로웠다.
p.s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 <인셉션>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등등이 떠올랐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말한 적 있지만 존재의 집에는 기억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는 기억의 지층을 탐사하는 존재론적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시간, 기억과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