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공연을 봤지만 이렇게 울림이 있는 공연은 오랜만입니다

15년 전 봤던 가장 인상깊었던 공연이 다시 했다는 소식을 11월 말에나 알았네요

그 때 20대였던 나이가 이제 40이 되어갑니다.

15년간 매년 한두번씩 다시 공연하는지 검색해 봤지만 세월이 지나서인지 이번에 놓치고 말았네요

아쉬움과 그 때의 생각을 다시 해 봅니다.

올해 공연을 기회로 다시 재공연하실지 모르겠으나

이 글이 그 때 그리고 지금 공연에 계시던 분들에게 전해질 지 모르겠으나

그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는, 15년 전의 아련한 나를 느끼게 해준

그 소식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극 슬픔의 노래는 참으로 신비하고 격정적인 작품이다.

나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희뿌연 안개 속에 사로잡혀서 피부에 와 닿는 차가움과 축축함을 느끼며 뼈아픈 서글픔을 견뎌야만 했다.

인간의 욕망의 역사가 축적된
슬픔의 강....그 강이 온몸으로 우는 슬픔의 노래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이 슬픔의 강이 흐르는데
예술가란 살아 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자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강의 물살을 보고
물살의 울음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욕망과 희열 파괴와 생명을 반복하는 업을 타고난 사람들....

희망과 빛 혹은 사랑은 슬픔의 강 너머에 있기에
이 작품은 강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 되묻고 있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광주학살에서 계엄군으로 민간인을 죽였던 박운형(박지일)과 계엄군에 의해서 사랑하는 여인과 뱃속의 아이까지 잔인하게 잃었던 민영수(손성호)는 현실을 도피해서 해외로 떠났지만
결국 폴란드에서 만나 함께 그 슬픔의 역사를
짊어 진 채 살아간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있는 기자 겸 소설가인 유성균(남명렬)

슬픔의 역사는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다가올 미래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곁에서 슬픔의 노래를 부르며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강물을 인지하지 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나간 뼈아픈 역사와 부조리한 현재를 방관 한 채 자신의 이익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예술가들은 이러한 강물의 아픈 노래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속고 속이며 잔인하게 파괴하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창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슬픔의 강물과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감사 한지 모른다.
삶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괴롭고 조금 아프고 예민함에 불안할지라도
인생에서 좀 더 넓은 곳과 좀 더 깊은 곳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박운형역의 박지일 배우님의 연기

광주학살 계엄군으로 민간인을 살해하고 평생을 죄의식에 시달리며 폴란드까지 와서 연극배우를 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죄책감 그 이면에 또 다른 처참한 고통 즉, 생명을 자기 손으로 꺼뜨릴때의 그 쾌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뜨끈하고 말랑한 것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면서 이윽고 자기 손안에서 터져 갈 때에 축 늘어진 그 무게와 온몸을 관통했던 그 짜릿한 전율이 쾌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욕망하면서도 처절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평생을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며 살아간다.

박운형은 무대 위에서 죽임을 당하고 죽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바로 등 뒤에서 바짝 쫓아오는 고통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며 발작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러한 욕망과 죄의식이 범벅된 발작적인 연기가 오히려 관객들에게는 무아의 경지에 오른 한 배우를 통해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배우를 통해서 그 울림이 전해지는 위대한 경험말이다.

개인 박운형은 비참한 역사를 온몸에 가득 떠안은 채
스스로 슬픔의 강이 되어 입안에 피맛이 나도록
그 울음을 울면서 끝없이 흘러가지만 말이다.

이제 진실된 소설을 쓰는 것을 꿈꾸지만
기자를 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던
유성균이 어떤 글을 통해서 슬픔의 강을 건널 지가 궁금해 진다.

그리고 유성균과 도플갱어인 관객인
나 자신도 어떻게 슬픔의 강을 건너서
희망에 닿을 수 있을지....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뿌리뽑힌 자, 상처 입은 자들을 위로하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연륜 있는 배우들의 명연기만으로도 볼 만하다.

얼마만에 느꼈던 감동이었을까..
공연을 검색하고, 티켓을 예매하고, 공연 관람까지...
그리고, 나도 이제 늙는 것인지..
이해도 늦고, 감동도 늦는다.
두 번 관람을 한 후에서야..
이해가 되었고, 감동이 밀려오다.
처음보다 두배의 크기로..
최고의 작품, 최고의 연기자..
올 해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