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지상 "'벤허'에 큰 자부심 느껴...내게 자신감 준 작품"

작성일2019.09.10 조회수3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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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배신과 몰락, 빛나는 성공과 설욕을 모두 겪은 남자, 굴곡진 인생 여정 끝에 삶의 숭고한 의미를 깨닫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벤허’가 두 번째 시즌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복수·용서·신·사랑을 아우르는 진중한 메시지와 드라마틱한 서사, 강렬한 액션씬을 담은 이 뮤지컬은 그만큼 배우들에게 큰 도전이 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올해 그 도전에 응한 배우 가운데는 그간 ‘프랑켄슈타인’, ‘젠틀맨스 가이드’, ‘킹아더’ 등에 출연해온 배우 한지상이 있다.

2년 전 ‘벤허’ 초연을 보며 자신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던 배우 한지상은 고심 끝에 오른 이번 무대에서 로마의 핍박에 맞서 유대 민족을 이끄는 영웅 벤허로 완연히 변신해 있었다. 성공적인 변신으로 기립박수를 이끌어내기까지, 이번 작품과의 만남은 그에게 그 어떤 때보다도 더욱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시간이었다고. 지난 5일, 배우 한지상을 만나 ‘벤허’와의 특별한 만남에 대해, 또 그가 걸어온 지난 시간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었다.

Q 프레스콜에서 할머니께 보여드릴 수 있는 작품을 하게 되어 좋다고 하셨는데, 할머니께서 ‘벤허’를 보셨나요?
네, 보셨어요. 잘 보셨다고 어깨가 올라가셨어요(웃음).

Q ‘벤허’ 초연을 보면서 ‘벤허를 연기하는 배우는 따로 있구나’라고 생각하셨다고요. 어떤 점 때문에 이번 ‘벤허’ 재연에 출연하기로 하셨나요. 
일차적으로는 이번 재연에 추가된 넘버 ‘살아야 해’를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게는 그 노래가 이번 재연에 참여하는 큰 명분이자 열쇠가 됐어요. 그 곡이 담고 있는 감정이 제가 벤허로서 긴 그래프를 그려 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돼주고 있거든요. 

영화 ‘벤허’ 혹은 뮤지컬 ‘벤허’ 초연을 보신 분들, 또 ‘벤허’라는 작품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분들은 벤허가 배신을 당하고 복수를 하는 기본 스토리는 다 알고 계세요. 근데 그 큰 뼈대를 뮤지컬만의 특수성을 갖고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가 제게는 큰 숙제였어요. 그 지점에서 키워드가 된 곡이 ‘살아야 해’였죠.

‘살아야 해’는 큰 힐링을 주거나 답을 제시하는 곡은 아니에요. 참 처절하고 슬픈 노래죠. 이제 희망도 없고 답도 없으니 난 그냥 모두 버리겠다, 이렇게 더럽게라도 기꺼이 살아주겠다, 바닥까지 가보겠다는 처절함이 있는 곡이에요. 그 처절함이 1막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큰 열쇠가 됐고, 한지상도 재연 ‘벤허’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어요. 그 후에 나오는 넘버 ‘운명’이 주는 임팩트도 크지만, 거기까지 스토리를 잘 쌓아가는 데 있어 ‘살아야 해’가 큰 도움을 줬죠.
 



Q 말씀하신 대로 벤허는 처절한 심정으로 ‘살아야 해’를 부르고 로마의 아들이 되지만, 양아버지 퀸터스 장군이 죽은 후 로마에서 얻은 부와 명예를 버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의 심정은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음…쉽게 말씀 드리면 ‘노선’을 바꾸는 것 같아요. 당시 상황에 대한 대처방식이 옳지 않았음을 스스로 깨닫고 좀 더 강경하고 급진적인 노선을 택하는 거죠. ‘운명’이 그걸 보여주는 노래이고요. 가사에 드러난 대로 “본분을 잊지 말고 피에 젖어 뜨거워지는 복수의 칼을 들어야겠다”는 명분도 있지만, 넓게 봤을 때 벤허라는 한 인간의 노선과 성향이 바뀌는 순간이기도 해요.

물론 벤허도 당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분명히 있었어요. 극 초반에 “저들의 채찍에 헐벗는 우리 영혼, 당신께서 약속한 희망은 어디에 있나”라는 대사를 하는 데서 알 수 있죠. 그런데 동시에 “다 평화롭게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말이 벤허의 온건했던 대처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그러다 배신을 당하고 가족을 잃으며 바닥을 쳤고, 기꺼이 로마인이 되어 주겠다는 현실 타협이 있었고, 그 모든 사건과 환경을 통해 벤허도 배운 거죠.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겠어요.

양아버지 퀸터스 장군의 죽음을 통해서도 벤허는 배운 거에요. ‘나에게 제2의 삶을 살게 해준 양아버지의 긍지가 손상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명분을 잊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강경하게 태도를 바꾸는 거죠. 벤허는 리더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리더가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의 조직을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엄청난 변화라고 봐요.
 



▲ '벤허' 공연 사진

Q 벤허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내·외적으로 신경 쓰신 것들에 어떤 게 있나요?
주옥같은 대사와 가사, 음과 멜로디에 이미 너무 디테일한 정보가 담겨 있어서 그걸 따라만 가도 거의 80~90퍼센트는 돼요. 나머지는 제가 만들어가야 하는데, ‘구분’을 잘 했어야 했어요. 저와 벤허의 닮은 점, 그리고 닮지 않은 점을.

벤허와 닮은 점을 저로서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컸죠. 근데 그 때마다 연출님(왕용범)이 닮은 점이 아닌 차이점에 대해 설득력 있게 인지를 시켜주셨어요. 한지상이 아닌 벤허가 그 당시 고민한 지점, 선택한 지점은 무엇인지를요. 그래서 ‘나라면 그렇게 안 했을 텐데’를 버리고 ‘벤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택하면서 작업을 해온 것 같아요.

Q 닮은 점은 무엇인가요?
주위 환경에서 영향을 많이 받고 거기서 배워간다는 거에요. 벤허는 진중하고 무게감 있고 사회적으로 리더로서 큰 위치에 있는 인물이지만, 환경에 많이 영향받고 지배당하고, 또 배움을 갈구했던 인물인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자신을 많이 내려놓고 비우는 작업이 필요했을 거에요. 모든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배우는 인물이고, 그만큼 많이 변화하는 인물이죠. 그게 너무 인간적인 것 같아요. 이번 재연에서는 벤허의 인간다움이 더 부각되지 않았나 싶어요.
 



Q 그렇다면 이번 작품을 하면서 한지상 씨가 배운 점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 어떤 작품을 할 때보다 더 연출님의 디렉팅에 경청을 했어요. 더 수긍하고 받아들이려고 했죠. 다른 작품을 할 때보다 제 고집을 훨씬 많이 비우고 덜어냈던 것 같아요. 저를 더 비우고 ‘벤허’라는 작품을 느껴보고 싶었고, ‘왕테일(왕용범+디테일)’을 더 느껴보고 싶었거든요. 과연 연출님이 설계하신 설계도가 뭘까, 내가 모르는 게 있겠지, 하고 더 여지를 뒀어요. 그러면서 많이 배웠죠.

연출님이 자주 쓰시는 말 중에 “그건 효과적이지 못할 것 같다”는 게 있는데, 그 한 마디로 제가 설득된 적이 많았어요. 저는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크기 때문에, 제 고집이 효과적이 못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시면 바로 수긍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이 저를 짜릿하고 기분 좋게 정리해주는, 잘 수그러들게 하는 한 마디였어요.

그만큼 이번 작품에서 정말 효과적이고 싶었어요. ‘벤허’가 가진 서사에 누가 되지 않는 효과적인 표현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저를 많이 비웠죠. 그런데 동시에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한지상만의 의외성은 남아 있도록 연출님이 열어 주셨어요. 많이 절충되어 있어요.
 



Q 힘들 때 의지처로 삼는 것에는 어떤 게 있나요?
저는 누가 해준 말 중에 귀에 꽂히게 멘토링해주는 말이 있다면 이상하게 그게 평생 가요. 그런 게 힘이에요. 그 중 하나가 8년 전 ‘넥스트 투 노멀’을 할 때 남경주 선배가 해주신 말이에요. 그 때 “지상아, 너에겐 너무나 빛나는 개성이 있고 특수성이 있다. 근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것과 함께 보편성을 곁들여라”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꽂히더라고요.

지금 돌아보면 그 이후 8년 동안 제 톤이 많이 바뀌었어요. 내가 보편성을 얻기 위해 뭘 해야 할까 생각했을 때 그 중 하나가 톤이었거든요. 톤이란 건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인데, 말할 때도, 움직임에도, 외모나 눈빛에도 톤이 있잖아요. 그 톤에 있어서 저는 보편성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그 때의 자료를 보면 저도 깜짝 놀라요. 톤이 많이 바뀌었고, 음악적으로는 중음이 세졌어요. 몸으로 얘기한다면 코어가 강해진 거에요.

결과적으로 톤이 바뀜으로써 그 때 가졌던 특수성이 엷어지긴 했지만, 그만큼 보편성을 얻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캐릭터의 여지가 넓어진 것도 사실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넥스트 투 노멀’의 게이브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갸롯 유다 같은 캐릭터는 특수성의 결정체였던 것 같아요. 갸롯 유다를 할 때는 음악적으로도 제 특유의 까랑까랑함이나 철성으로 완전히 승부했죠. 하지만 그 이후 보편성이 넓어졌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다양성으로 ‘프랑켄슈타인’이나 ‘젠틀맨스 가이드’ 같은 작품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때의 특수성만 갖고 있다면 지금 ‘벤허’를 못했을 지도 몰라요.

이건 어떻게 보면 제 자부심이기도 한데, 저는 다른 (주연)배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연 생활이 길었어요. 삼십 대 초중반까지 조연을 했으니까요. 그 때 제 무기였던 특수성에 보편성이 가미됨으로써 주연으로 옮겨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건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조연 배우의 특수성에도 감탄할 수 있지만, 주연 배우의 무게감에도 많이 의지하거든요. 관객들이 그렇게 주연 배우를 믿고 따라갈 수 있는 힘은 그의 보편성에서 오는 것이고요. 주인공이 너무 특수하기만 하면 관객들이 따라갈 수가 없어요.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니까요.

남경주 선배님은 아마 그 때 하신 말씀을 제가 이렇게 크게 받아들인 줄은 모르실 거에요. 이 인터뷰를 읽으셨으면 좋겠네요(웃음). 지금도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는 모습이 후배들에게 많이 귀감이 돼요.
 



Q 다양한 작품 활동을 통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아집과 독단을 경계하는 것이 제가 지향하는 것이고, 제가 앞으로도 가져가야 할 숙제에요. 성장할수록 악의 유혹이 크게 도사리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많아요. 자기 확신이 중요하고 또 그것을 실현시킬 때 제가 성장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다음에도 이렇게 하면 맞겠지’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걸 너무 신뢰하지 말자고 생각해요.
 

제가 “다른 건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니다”라는 말을 좋아해요. 정답은 늘 여러 가지이고 틀린 건 없다는 거죠. 저는 좀 삐딱하다고 할까, 반항심 혹은 저항심, 틀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자유롭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에요. 마이너 성향도 강하고요. 그만큼 획일적인 답을 경계하려는 마음이 강해요. 다르게 해보고 싶은 욕구가 크고, 사람들이 각자 가진 개인 취향을 많이 존중하려고 하고요.
 

또 그런 마음이 제가 (다른 사람들과) 쉽게 화합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되어주기도 해요. 사람들은 각자 생긴 모양도 다 다르고 정서적인 퍼즐도 다르잖아요. 그걸 서로 맞출 때는 ‘저 사람은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게 아니다, 내 잣대로만 판단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해야 하고, 그럼 어느 순간 제 퍼즐을 깎아야 하는 순간이 와요. 그럼 깎자, 내려놓자고 생각하죠.
 

저와 ‘벤허’라는 작품의 만남도 그랬어요. 그 어느 때보다 연출님 말을 굉장히 경청해서 들었고, 포기도 빨랐어요. 효과적인 배우가 되고 싶었으니까요. 또 그만큼 제 표현을 많이 허락하고 열어준 연출님에 대한 감사함도 커요. 그 감사함이 커서 연출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고, 생각하시는 그림을 많이 따라가려고 했죠.
 

Q 마지막으로, 아직 ‘벤허’를 보지 않은 관객들에게 한 마디 하신다면. 
‘벤허’는 듣도 보도 못한 한국 창작뮤지컬이고, 큰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초연 ‘벤허’는 모르겠지만 재연 ‘벤허’라면 한지상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어요. 그래서 감사하죠.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플레이디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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