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수요일 오후 오랜만에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대학로 정보소극장으로 향했다. 내일 있을 단체관람에 참여하지 못할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미리 예매해두었던 표를 찾았는데 정보 소극장은 말 그대로 매우 조그마한 극장이었다. 내 자리는 제일 앞이었고, 처음에는 무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배우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할까하는 지나친 걱정을 하며 어쩔 줄 모른 채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리고 옆자리의 여학생이 노트와 펜을 들고 공연감상을 준비할 때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공연의 시작은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였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무대로부터 어떤 향기가 난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 이 향기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무대 위의 배우들이 움직일 때마다 아로마향 같은 것이 계속 흘러나왔다. 향에 취해 연극에 빠져들 때쯤 배우들은 조명의 변화와 함께 장소를 바꾸어 움직였다. 무대의 공간은 정보기관이었다가 영동교였다가 심지어 군부대 초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때이건 간에 무대 장치들은 최소한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고문 공간은 돌리면 벽이 되었고, 책상은 그 쪽의 조명만 꺼버리면 언제든지 가려졌다. 조명은 꺼진 순간, 무대는 우주가 되었다. 소품의 네 귀퉁이에는 물론 무대 전체에 붙어있는 야광테이프들이 마치 별처럼 반짝였기 때문이다.
하얀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검은색 바지는 정보기관 형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었고,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은 ‘연두식’이라는 이름과 무척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런 연두식과 가장 대조되는 인물은 ‘주현미’였다. 연두식은 겉모습은 거지 그 자체지만 풍부한 감성의 시인인 반면, 주현미는 겉모습은 귀부인이지만 속은 무지한 ‘짝퉁 가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묘한 일치점을 보여주었다. 다른 배우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계속해서 말투와 의상을 바꾸었는데, 극에서 의상의 변화는 곧 인물의 변화를 의미했다. 극 중 가난한 시인들이 빈폴 남방과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었다는 의도되지 않은 연출이 보이긴 했지만 역시 의상은 그 어떤 요소보다 인물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극의 짜임은 기대하던 이상이었다. 무대에 변화가 주어질 때마다 테마곡인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의 멜로디가 흐르는 이 연극은 나이가 드신 분들께는 향수를 일으키는 요소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아무런 공감대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연극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깨졌던 것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형사와 연두식의 첫 대사가 시작할 때부터 나는 연극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이쯤 되면 지루할 법도 한데 한 시도 나를 놓아주지 않고 긴장의 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휴먼코메디’가 전해주는 억지스러운 웃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비 내리는 영동교’의 웃음은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자연스러움, 바로 거기서 나왔다. 또 여러 부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전화’라는 오브제를 통해 계속 연결되었는데 이 속에서 전혀 관련 없는 연두식과 주현미가 교묘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화를 통한 장소의 연결은 분명 좋은 선택이었으며 관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내게는 이 ‘전화’가 그들은 연결할 고리의 전부인가 하는 아쉬움을 끝내 남겨주었다.
내게 아로마향으로 다가온 이 연극은 문어 빨판 같은 노릿한 냄새로 나를 이끌다가 마지막에는 아몬드 향의 연기를 전해주었다. 주현미의 노래와 함께 전해진 이 향은 앞으로 반 년, 아니 일 년은 지워지지 않을 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