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시다시피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억척어멈이라고 불리는 여인이죠. 삼남매와 함께 마차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그녀가 얼마나 지독하리만치 억척스러운지 주변에서 부르던 별명이 이젠 이름 행세를 할 정도입니다. 것도 그럴 것이... 삼남매의 아버지가 다 다른 사람이고 남과 북이 싸우는 전쟁통에 죽지만 않아도 다행인 상황에서 18연대를 따라서 옮겨 다니며 이리 저리 장사를 수완 좋게 하고 있으니... 당연한 호칭이지요. 그러나 개인이 가진 삶에 대한 의지가 제아무리 대단해도 별 수 없는 게 있나 봅니다. 그렇게 괄괄한 기세로 걸었던 길 위에서... 그녀는 결국 자식 셋을 다 잃고 어머니에서 노인으로 변해가는군요.

원작자인 서사극의 대가 브레히트 서거 50주년이자 연희단거리패 창단 20주년을 기념하여 공연된 작품이라던데... 보통 무슨 기념 공연이라고 수식어가 붙은 걸 보면 허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은 제대로 기념공연다운 기념공연이었습니다. 그동안 브레히트의 작품을 종종 봤고 훌륭한 공연도 있었지만 우리 것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이만큼 아귀가 딱 맞게 번안되고 연출된 작품은 없었던 거 같아요. 우리 소리와 탈의 활용이 작품과 고르게 융화되어 섞여 들어가는 것만 보더라도 공을 많이 들인 흔적이 보였습니다. 덕분에 연희단거리패 작품 중에 <햄릿>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죠.

연희단거리패이기에 가능하고~ 제 맛을 잘 살려낼 수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번안과 연출을 맡으신 이윤택님과 무대에서 찰지게 소화해낸 김미숙님이 있습니다. 김미숙님은 그동안 중심에서 약간 빗겨나서 극의 활력을 넣는 역할을 주로 했는데 이번엔 억척어멈의 요동치는 감정과 무대의 중심축을 제대로 잡고 있더군요. 어쩌면... 억척어멈이 일찌감치 마차를 포기하고 길을 버렸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걸 걸고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는 것 역시... 잘 알죠. 확실한 것 따윈 아무것도 없는 세상 속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계속 굴려야 하는 우리네 인생이 못내 서글픕니다.

작년에 연극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브레히트라는 인물을 배웠고...
그는 사람들이 연극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게 하는 요소를 없애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만들어...
연극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은 단지 연극이다 라고 각인시켰다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브레히트의 대표작인 하나인 "억첨어멈과 그의 자식들" 작품이 올렸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눈으로 확인 하기 위해 공연장에 갔을때....
나는 억척어멈 역을 했던 김미숙씨의 신들린 연기를 보고 도저히 감정이입을 안 할 수 없었다....
물론 감정이입을 못하게 하는 장치인 미리 자막을 통해 극의 흐름을 알려주는 점은 어느정도 브레히트적인 연출법이라고 하겠지만....
작년 이 작품을 보고 생각했던 점이였다...
이번에 소극장이 아닌 대극장에서 다시 작품을 올렸다고 해서 학생으로써 적지 않은 지출을 머금고 다시 공연을 보게 되었다...
소극장에서 못 보여줬던 아쉬움을 어느정도 해소 시켜줬던 작품....
언제 봐도 김미숙씨의 연기는 감정이입을 안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벙어리 딸로 나온 분은 항상 아름다웠다...^^

이렇게 멋들어지게 한국의 관객들에게 맞게 각색한 분이나,
그리고 한국적 정취가 묻어나는 사투리와 음악을 만들어낸 작가와 음악가
거기에 작품을 훌륭히 소화해낸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들의 열연.

특히 '한국의 관객들에게 맞게'라는 표현은
단지 순간적인 재미나 찰나의 쾌감을 안겨주는 방식이 아니라
한국의 현실을 살아가고, 과거의 고통의 굴레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민'을 안겨주고, '반성'을 하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연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는 관객들에게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우리들의 과거의 고통과 치부를 가감없이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순간적인 웃음과 경쾌한 멜로디만이 넘쳐나는 최근의 공연계에서
이렇게 재구성된 작품들의 묵직한 울림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완전해지는 놀라운 이윤택님의 번안연출!
연희단거리패만의 한국적 정서의 고집에 박수를.

연극을 보는 이유가 먼가
난 그 무엇보다도 배우를 보기 위해 간다
아무리 훌륭한 연출자와 좋은 작품이라도 사진 몇컷만 보고도 배우의 수준을 가늠하게 되는거다
그만큼 연극을 볼수록 배우를 보는 눈이 높아진다. 와인을 먹는거랑 진배다를바가 없다
와인을 처음 먹게 될때는 부담없는 달짝 찌근한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맛이 입에 익을 무렵 와인을 선별하게 되고 음미하기 시작한다.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까진 아니지만 현대연극의 거장이다. 그의 작품성이 한국의 장단과 6.25란 역사성에 묻어나는걸 볼 수 있다라는 자체가 나에겐 감사할뿐이다.
약간 달라진 캐스팅으로 두번째 이 공연을 봤다. 연극이란게 이런 맛도 있구나하는 걸 느끼고 싶은 분들께 권하고 싶다. 그러나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데 당신한테도 이 공연이 좋을거라고 장담은 하지 못하겠다. 다만 나에게 배우들은 무척이나 와닿았다. 그들의 숨결을 느끼러 가는 이유가 내가 영화가 아닌 연극을 보러 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