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덕님의 로물루스역을 볼수 있었던 것에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어 무재에서 오래도록 뵐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 <로물루스 대제>가 제3회 늘푸른 연극제에 정식 참가작으로 선보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 오후에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여름의 늦더위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맑고 화창한 날씨속에서 마로니에 공원 일대에서는 한국문학의 현재를 조명하는 축제가 한창이었는데, 연극과 문학은 서로를 보완하는 상관 관계에 놓여있기에 문학적인 대학로의 정취에 늘푸른 연극제와 문학주간 축제의 들뜬 분위기를 만끽하며 주말 오후의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천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유럽과 그리스, 중동 일대에 존속하며 팍스 로마나의 기치아래 의회 민주주의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유럽의 문화적 토대를 남긴 위대한 로마 제국 흥망의 역사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씨의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로 기록된 로물루스에게 대제라는 칭호가 부여된 제목의 의미를 상상하며 무성한 덩쿨에 방치된 위대한 로마인들의 흉상과 닭들이 정원을 점령한 황폐한 궁전의 삭막한 풍경을 응시하며 조용히 객석에 앉아 무대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습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모하여 활발한 정복 사업과 이민족과의 전쟁을 거듭하며 영화를 구가하던 로마는 지나치게 넓어진 국토와 새로이 편입된 시민들에 대한 통치의 어려움으로 인해 동서로 분할되어 여러 정제와 부제가 난립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끊임없이 라인 방면을 경계로 대립하던 게르만 부족의 대규모 침공을 맞게되면서,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능함 앞에 로마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로물루스는 귀족집안 출신으로서 출신 성분의 한계를 느끼던 선황의 공주와 정략 결혼을 통해서 황제가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로마에 개인적인 증오를 갖고 있던 로물루스에게 황제의 권좌는 권력과 명예의 자리가 아닌, 로마에게 복수할 절호의 명분과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협앞에 황제는 항전이나 파천이 아닌 스스로 제국의 멸망을 선택합니다. 그는 과연 모든 왕조의 마지막 황제들이 그러했듯이 무능하고 어리석은 왕이었을까요?

<로물루스 대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앞두고 황제의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 심지어 적군인 게르만족의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오랜 포로 생활의 고초를 겪어 게르만인에 대한 증오로 불타오르는 장군 에밀리안과 정규군의 참패를 알리기 위해서 밤낮으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기병대장은 늙고 감각이 무뎌진 황제와 측근들을 증오하며, 황후는 적군에 대한 방어와 철저 항전을 주장하지만 재정이 바닥난 로마는 군사와 함선을 모을 국방비를 조달할 여력이 없습니다. 대신들은 여러가지 의견을 상주하지만 계획을 실행할 의지도, 적군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도 없이 황제의 눈치를 보기 급급합니다. 권력다툼에 패해 망명한 동로마의 황제는 불평을 늘어놓기만 하고, 문명화된 시종들과 다른 로마인들 역시 제국의 멸망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할 뿐이지요. 황제는 로마는 멸망할 때가 되었을 뿐이며, 다른 민족들에게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며 체념합니다. 항전을 주장하며 섬으로 피신을 도모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황후와 종묘사직과 백성들의 고초를 염려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화려했던 제국의 막을 스스로 내리며 마지막 황제라는 오명과 죽음을 기꺼이 감수하는 황제중 누가 더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연극은 로마 제국의 흥망사를 통해서 오늘날의 국가관과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조국]이란 무엇이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나라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얼마나 위험하고 부질없는 것인지 말하는 황제와 레아 공주의 대화와 바지사장 씨저루프로 대변되는 대기업과 상사의 인수합병,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본주의의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경계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지적이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단순히 로마의 멸망과 지도층의 무능을 풍자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150분간의 긴 시간동안 로물루스 황제의 인품과 사상이 펼쳐지면서 인간 로물루스에 대한 연민과 국가의 탄생과 죽음이 되풀이 되어온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소중하고 특별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40여년만에 로물루스역을 다시 맡아 열연을 펼쳐주신 권성덕 배우님의 멋진 연기와 풍부한 인물 묘사는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속에서도 의연하고 유머 감각을 잃지않는 황제의 통찰력과 판단력은 진정한 희극이 비극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뒤렌마트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영웅, 반민특위에 이어 출연하신 베테랑 배우님들과 젊은 연극인들의 완벽에 가까운 호흡은 로물루스 황제의 고독과 깊은 슬픔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연극 발전에 공헌하신 원로 연극인들을 조명하는 늘푸른 연극제가 올해로 3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참가작 가운데서도 <로물루스 대제>는 거대한 스케일과 로물루스 역으로 한시대를 풍미하신 권성덕 배우님의 저력과 베테랑 연극인들이 걸어온 한국 연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는 다시없을 소중하고 특별한 기회로서 꼭 한번 보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완벽한 무대를 선보여주신 배우님들의 열정과 관계자 여러분들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연극 로물루스 대제의 성공과 권성덕 배우님께서 언제까지나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멋진 연기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응원합니다.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 가는 것은,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속 문장으로 후기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쓸쓸한 감촉을 가진 단어다. 어떤 아름다운 단어도 마지막이 앞에 붙으면 덧없게 느껴진다.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위엄을 갖춘 말일수록 더더욱 그 덧없음은 크게 느껴진다.

''마지막 황제''라면 어떨까.

만주국의 어린 황제 푸이가 생각나기도 하고,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마노프 왕가의 니콜라이 2세 등이 생각난다. 내 기억에 남는 마지막 황제는 기세 등등했던 과거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힘겹게 자신의 삶을 버티다 결국 제국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했다.

거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 한 세기의 마지막 황제.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새롭게 그린 연극, <로물루스 대제>는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이 주는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 작품이었다. ''슬픔''이 드리운 ''마지막''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녹아낸 작품 <로물루스 대제>를 2018년 8월 24일 금요일에 보았다.

제3회 늘푸른 연극제 (우리 연극계에 기여한 원로 연극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행사로 선정 연극인들의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극 축제)라는 뜻깊은 행사에서 올린 <로물루스 대제>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오는 2018년 9월 2일까지 열린다. 처음 올릴 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화려함은 알고 있지만, 제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해선 잘 몰랐다. 화려했던 시절이 찬란했기 때문에 그 마지막을 살펴볼 틈이 없었다. 아마 한 나라가 무너질 만큼 폐단과 악습이 판을 치는 형국이었을 것이다. 이를 다르게 바라본 한 극작가는 ''비극적일 수도 있었던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새로운 세기를 열었던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만드는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실제 로마 제국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이 연극에선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 자체가 이 연극의 핵심이란 생각이 든다.

고대 로마 제국은 왜 망했을까?

이 본질적인 질문에 우리는 지도자를 꼽곤 한다. 지도자가 잘못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망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로물루스 대제>를 보면 지도자가 한 나라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는 게 보인다. 로마 제국의 궁전과 그 뜰은 닭장으로 바뀐다. 어디에나 달걀이 넘쳐나고, 털과 오물로 가득 찬 궁전을 만든 사람이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궁전의 물건을 팔아 자신의 안위만 살필 뿐 나라 안과 밖을 살피지 않는다.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살피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그의 선택은 굉장히 무책임하게 보인다.

선황제의 딸이었던 아내의 다그침에도, 사랑을 포기하며 나라를 위해 정략결혼도 서슴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딸의 울부짖음에도, 로마제국을 지키기 위해 게르만 민족의 포로생활을 했던 예비 사위의 비난에도, 먼 길을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 병사의 간절한 외침에도, 각종 대신들의 조언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닭을 기르고, 그 닭이 낳은 달걀을 헤아리는 즐거움을 느낀다. 목축이는 포도주 한 모금에 편안함을 느끼며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린다. 그의 행동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하다.

처음에는 그가 왜 이렇게 무모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극 중 많은 인물들처럼 그를 마음속으로 비난하기도 했고, 로마 제국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함락되기 직전 아내와 그가 나눈 대화를 보며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로마제국이 망하게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황제가 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고백한다. 더는 회생 불가능한 로마를 망하게 하는 것만이 로마를 위한 길이라고 그는 판단했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오로지 감당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선택에 대하여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이 들어온다. 황제가 된 이상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제국의 막을 내리게 할 권리는 없다고 비판하고, 그의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전장에서 사라져갔음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질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로 로마를 존속한다면 치를 비용이 더 크다고 말한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 그가 자신의 딸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망해가는 제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말라고 말하는 로물루스 황제는 황제이면서 아버지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딸을 위한 진심이 담긴 그의 연기는 여느 연기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죽음과 온갖 고통은 자신이 감당하고, 딸만큼은 역사의 뒤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는 모습 자체였다. 로마의 문을 닫게 만드는 결단 속에는 한 개인 그것도 자신의 딸의 행복조차 지켜줄 수 없을 만큼 무능함도 담겨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연극은 그의 결연한 결정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비극적인 내용을 희극적으로 그려낸다는 건 쉽지 않다. "진정한 희극만이 비극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가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비틀어 "진정한 희극으로 비극을 표현하기는 것은 진짜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연기"라고 말하고 싶다. <로물루스 대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중심을 잡고 끌고 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작품이 정말 많지만, 특히 희극적인 요소와 비극적인 요소를 아우른 인물이 ''로물루스 대제''는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일 것이다. 배우 권성덕 씨는 특유의 목소리 톤으로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연기를 소화한다.

개성 강한 목소리가 연극에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나는 그의 목소리가 로물루스 대제를 더욱 로물루스 대제답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발음이 조금 무너져 대사전달력은 아쉬웠지만, 그 대사 자체보다 그 톤에 실린 감정이 <로물루스 대제>라는 작품을 끌고 나아가는 힘이 아닐까. 스스로는 웃지 않으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을 자아내게 하는 연기. 그것은 대사 자체에도 있지만 배우가 말하는 톤에도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걸 <로물루스 대제>는 보여준다.

<로물루스 대제>는 주연을 맡은 권성덕 배우에게는 뜻깊은 작품이다. 그는 극단 광장으로 공연한 <로물루스 대제>에서 로물루스 역의 탁월한 연기로 연극계에서 주연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주옥같은 명작에서 자신만의 연기를 펼쳐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가 늘푸른 연극제에서 다시 <로물루스 대제>에서 로물루스 역을 맡는다는 건, 그에게도 그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관객에게도 뜻깊은 시간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