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습니다. 2시간 30분이 후다닥 지나갔을 정도로 재미있고, 무엇보다 신선했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판소리에 대한 편견-지루하고, 어렵고, 낯설다-은 극중 나래이터역인 이자람(self)이 <적벽가>의 한 소절을 읊다가 ''이런 어려운 이야기 말고 쉬운말로 해보자''며 던진 인트로와 함께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상언어들로 이루어진 대사는 (당연하지만) 판소리극도 뮤지컬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며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농담, 비속어, 은어, 심지어 대사중에 ''아이폰''까지 등장하더라구요 ^^ 저 같은 경우는 판소리 특유의 가락을 잘 따라가지 못해 몇몇 대사를 놓치기도 했지만, 비교적 우수한 대사 전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65279;&#65279;&#65279;&#65279;&#65279;현대적 악기도 등장&#65279;&#65279;&#65279;&#65279;&#65279;했습니다. 3인이 연주하는 단촐한 악단은 때때로 드럼, 베이스 기타와 같은 악기로 구성진 이자람의 판소리 가락과 절묘한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프로그램북에 있는 인터뷰를 읽어보니, "옛 조상님들도 이런 악기를 알았다면 사용하지 않았겠냐"는 인터뷰가 있던데, 바로 이런 창의적인 발상이 이런 작품을 탄생시킨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구,동서양의 크로스오버를 의도적으로 추구했다기 보다는 서사를 갖춘 음악의 한 장르로서의 판소리를 있는 그대로 가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척가>에서 판소리는 장르적, 전통적인 편견에서 완벽히 벗어나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극예술로 표현되었으니까요.

혼자서 1인 15역을 해내며 극을 이끌어 가는 이자람의 탁월함과 매력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그 전에 먼저 <억척가>의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포를 좋아하시지 않는 분이라도, 1인에 의해 압축적으로 표현되는 인물들과 그 스토리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미리 내용을 예습하고 가시는걸 추천합니다.

<억척가>는 독일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터에서 손수레를 끌며 장사를 하는 전쟁상인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인 안나 피에르링이 결국 자신의 세 자녀를 전쟁통에 모두 잃게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익을 좆아 전쟁터를 누비는 탐욕과 기회주의적 면모,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았지만 결국 자신이 추종했던 전쟁속에서 그들을 모두 잃게 되는 비극적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 극작품이죠. <억척가>에서는 위ㆍ촉ㆍ오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때는 ''김순종''이었던) 억척어멈 ''김안나''가 등장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으로 건너와 세자녀를 이끌고 달구지에 물건을 실어 전쟁터를 누비는 전쟁상인이 되지요. 세 남매를 차례로 잃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극이 전개됩니다.

이자람은 극 중에서 억척어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꾼(나래이터)부터 시작해서 사실상 극중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혼자서 연기합니다. 간단한 소품과 의상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순전히 연기와 말투, 그리고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1인 15역을 무리 없이 소화합니다. 가끔은 정말 각각의 배역에 빙의된듯한 느낌마저 주더라구요. 예를 들면, 이자람은 방금 눈 앞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애끓는 심정으로 연기하다가도, 돌아서면 겁없이 바른말만 하는 패기넘치는 신참병이 되었다가, 하늘의 도가 어쩌고 하는 입만 살아있는 도사가 됩니다. 관객들은 한 사람이 말투와 표정을 바꿔가며 모든 역할을 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설득력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짧게 등장하는 인물이라도 캐릭터가 분명했거든요. 연극에서 1인극을 몇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빠르게 전환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신통방통한 연기력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앞자리였다면 표정까지 볼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ㅠㅠ

덧붙이자면, 판소리 공연에서는 객석에서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 예의라고 합니다. "좋다~", "얼씨구~" "잘한다~!" 등의 추임새를 적절하게 던져주는 거지요. 처음에 조금 객석이 뻣뻣했는지, 이자람님께서 공연 중간에 연습을 시키더라구요. 물을 마시거나, 잠시 쉬어갈 때, 어색함 없이 공연을 끊어 가는 건 영락없는 길거리 이야기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판소리 특유의 익살이랄까? 앞서 말한 능청스러움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이자람이라는 소리꾼이 억척네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런 저런 사람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판소리가 과거에 저잣거리나 동네 앞마당에서 이렇게 상연되었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중간에 갑자기 객석에 막걸리를 돌리는 래파토리가 있었는데, 그 이후로 객석 반응이 좋아진것도 같아요...ㅎㅎ말 그대로 객석이 아닌 길거리에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랄까요? 초연때는 아예 객석을 무대위로 올려서 객석과의 거리를 더 가깝게 했다고 하는데, 판소리극이 가진 매력중 하나가 바로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크지 않다는 점 인것 같습니다.

어째튼 공연은 판소리극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감탄으로 끝이 났습니다. 억척어멈은 홀로 공포, 연민, 슬픔, 분노, 탐욕, 냉소와 같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하며 관객을 울고 웃기며 2시간 30분을 훌륭하게 이끌어 갔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전석 기립이 이어졌고, 세번의 커튼콜이 계속 될 동안 박수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열기였죠. 어색해서 추임새를 넣어주지 못한게 못해준게 미안해서 저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습니다.

판소리극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기발함 무대와 재치넘치는 연출에 감탄했고, 이자람이라는 젊은 소리꾼의 매력도 만끽 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그램북에 몇몇 인터뷰가 실려 있었는데, 공연에 앞서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것을 다 쏟아 낼 수 있는 무대를 갖을 수 있다는 기쁨과 감사가 담긴 내용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자신이 말 한대로, 정말 그의 재능이 오롯히 쏟아져 나오는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천재의 공연을 보았다

대단한 이야기꾼 이자람! 노래도 연기도 관객을 집중시키는 아우라도 최고! 내년에 다시 억척가 하겠죠? 사천가도? 기대하고 있어요~ 이번에 하는 당통의죽음도 보러갈꺼예요! 이자람씨는 기대이상을 보여조니까요^^

bb

이자람의 대단한 에너지에 감동받은 공연입니다.
앞으로 또 공연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