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이윤택씨가 자신을 모델로 창조한 듯한 주인공 작가가 책을 읽고 인터넷을 하는 서재에는 이윤택씨 자신의 사진도 걸려 있고 원작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사진도 걸려 있어 이 작품의 다층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작가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이기도 하고 번안자 이윤택씨이기도 하고 연출자 채윤일씨이기도 하며 또 그 작품 속 작품을 자기 꿈 속에서 만들어내는 작품 속 작가이기도 하다. 또한 로물루스 대제는 노무현 대통령을 표상하는 역사적 알레고리이기도 하고 다시 후자를 통해 전자가 표상되기도 한다. 로물루스 대제와 노무현 대통령을 극작가 이윤택의 알터 에고(또다른 자아)가 연기하고 있고 그런 극작가를 다시 매우 오동식씨가 연기하고 있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구조가 흥미롭다.

다만 뒤쪽으로 갈 수록 그 다층성의 흥미로운 가능성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대사들을 통해서 유희화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너무 과장된 표출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희극성과 진지함이 잘 조화된 연극이고, 배우들은 성실한 연기의 모범이 된다.

공연 자체에 속한 문제는 아니지만, 공연장의 매표를 담당하는 직원이 아주 지나치게 불친절하고 위압적인 것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정말 부조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고 공연 관람의 분위기을 크게 방해할 정도였다. 공연 내용은 부조리한 세계를 표상하되, 공연장 직원은 인간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다.

2008. 9. 20(토) 오후 7시 게릴라극장에서..


비가 오는 토요일 저녁 한적한 게릴라 극장을 찾았습니다. 골목안에 있어 그런지 혜화역 주변같은
번잡함이 아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윤택씨가 이끄는 연희단 거리패의 작품입니다. 제가 굉장히 신뢰하는 극단이기도 합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연기 훈련을 아주 제대로 받기 때문에 발성이나 동선같은 연극의 기본이 굉장히 탄탄하거든요. 그리고 그런 측면은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피곤함에 지쳐 잠이 듭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이 10만원을 주고 사서 옷걸이로 쓰고 있던 헬레나와 아킬레스가 되살아나고, 서기 476년 서로마의 기병대장이 달여와 로마 제국의 멸망을 고합니다. 순식간에 작가는 멸망해가는 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되고, 작가는 이를 꿈이라 생각하면서도 기왕의 상황을 한국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제 상황은 한국을 둘러싼 북한, 일본, 미국등의 압박과 더불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선 자신의 딸을 아랍의 상인에게 시집보내야 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왕은 나라를 살리기 보다는 이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허구를 비웃는 거죠. 이에 왕을 죽이려는 자들이 몰려오고 왕은 그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담아 열변을 토해냅니다.

일단 이 작품은 강렬합니다. 보통 연극적인 것은 그런 것이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예를 들면 텅 빈 밥상을 가져다 놓고 밥을 먹는 것처럼 하고 물 한 방울 없는 데 마시면서
술을 마시는 척 합니다. 연극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연극을 보면서 그런 사실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울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릅니다. 실제 바나나를 먹고 실제 닭이 무대를 뛰어다니며, 실제로 목욕을 합니다. 이 목욕 장면이 약간 충격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 남자 배우의 성기가 노출되거든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쇼. 목욕을 하는데 팬티입고 하시나요? 아니죠?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연극은 그것을 그대로 보여줄 뿐입니다. 물론 그에 걸맞는 배우들의 용기와 열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지만요.

이 작품을 보는 재미는 이런 사실성 말고도 지적인 재미입니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 시대의 세계사적 지식, 우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 현재 동북아 정세 및 이명박 정부, 아나키스트 등등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지식과 상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굉장히 피곤한 상황에서 이 연극을 보시거나 아직 저런 지식이 부족한 학생이나 관심없는 성인이 본다면 "아 뭐가 이렇게 어려워?" "도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거야?" 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런 지적인 재미에 동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시는 분, 기꺼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분에게 추천하겠습니다. 주말 저녁 즐겨보는 지적인 유희,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와 더불어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출연 배우가 12명인데 반해 주말 저녁 관객수가 15명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연기한 배우들에게 미안해 졌습니다. 이런 좋은 작품에 더 많은 관객이 찾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게릴라 극장에서 봤던 두 편의 작품이 모두 러시아 또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외국 작품의 번역이었던 반면, 이번 '정말, 부조리하군'은 원작은 있되, 번안 정도가 아니라 기초만 그 곳에 두고 한국을 배경으로 하여 거의 새로 창작하다시피 한 작품이었던지라, 번역 작품에서 흔히 느꼈던 배우-이름-배경의 불일치는 다행히 피해갈 수 있었다. 내가 유독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뻔히 한국인인 것이 보이는데도 외국 이름에 외국 배경을 두고 공연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더라..

원작 '로물루스 대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의 황제였던 로물루스를 소재로 하여, 자신의 제국이 망해가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일종의 정치적 허무주의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번안한 이번 작품 역시 시작은 로물루스이되, 점차 한국의 현실로 옮겨오면서 이 나라의 갖은 문제점들을 '풍자'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중국의 동북공정, 남북관계 등등 크다싶은 주제들은 거의다 한번씩은 건드리는 것 같은 정도로 넓은 범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작가 이윤택과 연출 채윤일, 두 분의 정치적인 입장과 생각이 나와 많이 다르다는 점, 그래서 이 연극에서 로물루스이자 꿈을 꾸고 있는 작가의 입을 통해서 쉴 새 없이 나오는 대사들이 내 생각과는 지구-안드로메다 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구-해왕성 정도는 떨어져있어, 그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는 점은 일단 제쳐두자. 내가 연극을 보러 간 것이지, 진보신당의 정치 집회를 간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연 '풍자'라는 것이 이 연극에서 나타나는 모양 그대로 이뤄져도 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풍자라는 것은, 특히 대중공연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나는 풍자는 직접적이지 않으며 은유와 비유를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가능하다면) 그걸 넘을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고 본다면 그저 웃기거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로 칼날은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고, 한두번은 꼽십어야 이해하고 무릎을 칠 수 있는 그런 것이 바로 풍자여야 한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뱉어내는 것은 풍자가 아니라 '연설'이라고 해야 옳은 것 아닌가?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연극을 보러간 것이지, 정치 집회에 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로물루스이자 작가인 주인공의 입에서 로마가 아닌 한국의 현실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연극이 끝날 때까지 어떤 집회 현장에서 발언자의 연설을 듣는 듯한 느낌 뿐이었다. 등장인물들의 말이나 행동들이 '코믹'한 부분이 있어 좌우에 앉은 사람들이 의자를 흔들어대며 박장대소할 때에도, 그 웃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위 풍자극에서 풍자가 아닌 연설이 나오는데 잠깐 등장한 유머에 웃음이 그렇게 나올 수 있나??
닭, 닭장, 비현실적인 황제의 주변인물 등등 '풍자'를 위한 장치가 갖춰져 있음에도 황제나 '북에서 온 작은 남자'의 입에서 풍자가 아닌 정치 연설이 이어지는 것은.. 내가 이 연극에서 기대한 모습이 아니었다. 차라리 케자르 루프의 말들이 이 시대 문화를 제대로 '풍자'하는 모습일 뿐이다.

이런저런 파격적인 시도들, 배우들의 노력과 연기, 이런 부분들에는 두 말 할 것 없이 찬사를 보내야하지만, 연출과 작가의 무모해보이는 시도들에는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다시 보고싶은 작품이 될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