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런던에서 바라 본 한국의 공연시장은 무척이나 생기 있고, 활발해 보인다. 외적인 발전에 있어선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의 속도가 빨라 보이고, 소재의 다양성면이나 실험성 면에 있어서도 젊은 관객들의 관심에 부응하는 여러 가지 시도가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뮤지컬에 비해 다른 공연 장르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디게 보이는 느낌도 없지 않다. 또 우리나라의 다른 산업적 측면과 비슷하게 공연시장도 외적 팽창에 치우쳐 내적 성장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의 관심과 투자가 소홀히 돼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조금은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확장하다 보면 가능한 것도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한국 공연계의 양적/질적 팽창은 한국 공연계에 속도감을 가지고 왔다. 예를 들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경우, 런던 웨스트엔드에 상륙하는 시기와 한국에 도착하는 시기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고, 웨스트엔드의 공연들도 한국으로 진출하는 시기가 전보다 훨씬 빨라진 사실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살펴볼 공연들은 웨스트엔드를 거쳐간 작품들 중에서 아직 한국에 상륙하지 않았으나 조만간 선보여질, 또는 선보일 가능성이 있는, 또는 보여져야만 하는(?) 뮤지컬 작품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한국의 뮤지컬 팬들에게 사랑 받을 만한 해외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빌리 엘리어트> 2010년 최고의 기대주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뮤지컬들 중에 작품성에 있어서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탄탄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말한다면, 단연 <빌리 엘리어트>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광산촌 발레 소년의 성공스토리를 감동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2000년 원작의 동명 영화를 보고 자라난 한국의 팬들도 많을 뿐더러 뮤지컬 팬이라면 전부터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터, 2010년 한국 공연 팬들의 이목이 가장 집중될 작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 영국산 뮤지컬이 원작영화 이상으로 전세계 관객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뮤지컬만이 가지고 있는 작품의 완성도 덕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분명 뮤지컬은 영화를 그대로 무대로 옮겨온 것에 급급한 차원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서 무대에서의 미학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가지기 힘든 영국식 뮤지컬만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를 잘 반영한 것도 높은 점수를 줄만 하다.

영국 특유의 정서적, 문화적인 부분을 어떻게 한국식으로 풀어내야 하는가에 대한 우려는 원작의 유명세가 해결해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판 <빌리 엘리어트> 프로덕션이 넘어야 할 커다란 장애물로 생각 되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 버전이 얼마만큼의 런던 프로덕션의 질을 재현해 내는가가 관건이라고 하겠다. 과연 주인공인 한국 빌리가 런던이나 뉴욕의 빌리만큼 무대 기본기가 충실한 상태에서 지속적인 체력을 바탕으로 2시간이 넘는 공연을 무리 없이 끌고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지켜볼 문제일 듯 싶다. 흥행에 있어서는 남녀노소 어느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기면서 커다란 감동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라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다.


2. <애비뉴 큐, Avenue Q> 언젠간 꼭 만나야 할 뮤지컬!

<애비뉴 큐>야 말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특별함이 있는 참신하면서도 기발한 재치가 번뜩이는 뮤지컬이다. 미국의 어린이용 TV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릿, Sesame Street> 스타일의 인형들이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춤과 노래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이 작품은 절대 어린이용 뮤지컬은 아니다. 뉴욕 외곽 동네로 이사 온 대학을 갓 졸업한 주인공 프린스턴이 주위 이웃들과 어울리며 인생의 목적을 찾는 스토리는 여러 부분에 있어서 어른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야기다. 특히 취업난, 빈부격차, 인종차별, 동성애, 인터넷 음란물 등의 사회 문제들을 유쾌하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풀어내는 작품의 해학미는 그 어느 작품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참신하면서도 통쾌하다.

작품성도 작품성이겠지만, 6년간의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적인 장기 공연에 이어, 조금 더 공연에 대한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웨스트엔드에서 이 명랑-쾌활-성인-인형뮤지컬이 4년간 롱런 할 수 있는 이유중의 하나는 아마도 주 관객층인 젊은 관객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평일 티켓 가격 정책 때문일 것이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 공연의 티켓 가격을 다른 뮤지컬 공연의 절반 수준으로 유지해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티켓 가격 정책은 관객들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애비뉴 큐> 내용이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서와 비교할 때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전라의 배우들이 연극 무대에서 연기하는 지금 시대에 남녀인형이 보여주는 섹스 장면은 차라리 귀여운 애교로 봐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과 같이 젊은 관객들이 공연시장을 이끌어 나가는 곳에서는 <애비뉴 큐>는 한 번 흐름을 타면 충분히 흥행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만드는 정말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3. <라 카 죠 폴> 한국에서 멋지게 재탄생 될 수 있을까? 

 런던 메니에 쵸콜릿 팩토리 프로덕션의 뮤지컬 <라 카 죠 폴, La Cage aux Folles>이 한국에 간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보수적인 정치가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는 아들을 둔, 동성애자 부모 앨빈이 겪는 사회적인 편견의 모습들을 코믹하게 엮은 이 뮤지컬 코미디는, 원래 1980년대 초연된 조금은 연륜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프로덕션의 경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효과적인 연출과 함께 뒷받침되면서 웨스트엔드에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브로드웨이 베테랑 제리 허먼의 감칠맛 나는 음악이나 조연급 게이댄서 역할의 배우들이 엮어내는 발랄한 재미도 인기에 한 몫을 했거니와, 이 공연을 통해서 올리비에상 뮤지컬 부문 남우 주연상을 거머쥔 더글라스 호지의 걸출한 연기는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을 만큼 특별하다. 조만간 웨스트엔드 공연을 마치고 내년 봄 브로드웨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이 프로덕션은 더글라스 호지의 연기에 힘입어 브로드웨이에서도 기대 만큼의 성공을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라 카 죠 폴> 공연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동성애 코드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이거니와, 이 공연이 오리지널 팀이 아닌 라이센스 공연으로 제작된다면 런던 프로덕션의 참 맛을 어떻게 되살릴지 의문이다. 주인공 앨빈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더글라스 호지에 필적할만한 한국 배우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게이쇼를 멋지게 재구성할 만한 조연 배우들의 앙상블이나 제작팀의 탄탄한 팀웍도 쉽게 만들어지기 어려울 수 있다. 

 4.  <레미제라블> 명작은 영원하다?

24년째 런던을 지켜온 이 작품은 뮤지컬 팬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웨스트엔드의 기념비적 신화이자 산증인이다. 메이저 뮤지컬 프로덕션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 작품은 언제 보아도 기본 이상의 즐거움과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확실히 이 작품이 가지는 무게감은 어느 것 하나 쉽게 간과되기 어려울 것 같다. 빅터 위고의 원작 소설이 그러하듯 작품이 다루는 주제에서부터 음악, 가사, 연출,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가볍게 지나치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뮤지컬을 많이 접해보지 못하고 작품의 이름만 믿고 공연을 보러 간 관객들이 한숨 잘 자고 나오는 뮤지컬도 이 작품이다. 그만큼 공연의 스토리 진행이 빠르고 여러 장면들이 얽혀있어 초보 관객들이 소화하기엔 어려울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몇 차례, 브로드웨이 투어팀에 의해 공연된 적이 있다. ‘명작은 영원하다’는 어구가 어울릴 만한 완성도 있는 작품이지만, 최근에 이 뮤지컬을 다시 보고 새삼스럽게 느꼈던 것은 전과는 꽤나 다른 감정이었다. ‘이제 이 작품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라는 약간은 아쉽지만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뮤지컬 추세의 변화에 따른 시선의 변화였다. 20년 이상 지난 지금의 뮤지컬이 추구해야 할 방법론은 20여년 전의 그것과는 달라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어쩌면 반대로 작품은 변함없는데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각 프로덕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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