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넓은 파수꾼. 무대에서 펼쳐지는 세계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그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연출하는 작품이 바뀔 때마다 제가 빠져 사는 세상도 함께 바뀌고 있죠. 무대감독, 조명, 의상, 배우 등 모든 구성원과의 소통을 통해서 모든 것에 대해 관여하고,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사람이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질없는 배우, 떠날 수 없었던 무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다니면서 배우라는 타이틀로 많은 무대에 올랐어요. 당시가 1985년도였는데, 이 때부터 우리나라에 뮤지컬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어요. 뮤지컬 무대에 서는 일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전 노래가 약했거든요. 무대에 설 때마다 스스로 한계를 느낀거죠. 제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뒤도 안보고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영국에서 영어공부하고, 여행 다니는 생활을 일 년 정도 하다 보니까 무대가 그립고 성취감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공을 살려서 연출을 해보면 어떨까?’는 생각에 능력이 어디까지 닿을지 모르지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연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998년에 오태석 선생님의 <태>를 외국인 친구들과 연출가 이지나라는 타이틀을 달고 처음으로 올렸어요. 그 어느 때보다 큰 감동과 성취감을 느꼈죠. 나는 이 일을 해야겠구나, 그렇게 깨달았죠.




<바람의 나라> 매 공연 때 마다 만나게 되는 작품들이 제 인생을 채워주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바람의 나라>가 제 연출 인생의 집약인 것 같아요. 제가 처음으로 만든 창작뮤지컬이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연출을 시작할 때 가졌던 소망을 이룬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한국에서 처음으로 연출했던 작품도 연극 <태>였는데, 음악과 움직임이 중심이 되는 공연을 머릿속에 구상했어요. 그런데 워낙 예산이 적다보니. 제가 하고 싶은 것에 비해 할 수 있는 것들은 턱없이 적더라고요.

‘연출가로 자리를 잡게 되면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꼭 이런 내용을 규모 있게 다시 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룬 게 바로 2006년, 2009년 <바람의 나라>인 것 같아요. 당시 <태>를 보셨던 분들은 <바람의 나라>와 느낌이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첫 작품인 <태>는 <바람의 나라>를 이끌어낸 모태라고 할 수 있죠.





망했다면서 펑펑 울었죠. 2006년 처음 <바람의 나라>를 올렸을 때에는 정말 욕심없이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서울예술단에서 미는 카드가 <왕의 남자>여서 <바람의 나라>에 대해서 는 거의 관심이 없었거든요. 충분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불필요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연출가로서 다양한 시도를 과감하게 할 수 있었죠. 후회없이 쏟을 수 있었던 만큼 ‘이 작품 잘 나오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혹평이 쏟아지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부터 시작해서 ‘뭐 이 따위 공연이 다 있느냐’까지. 평론가, 기자 분들 할 것 없이 엄청나게 욕을 먹고 나니까 ‘내가 악수(惡手)를 둔건가 보다’는 생각에 당시 윤희석 조연출을 붙잡고 3시간 넘게 정말 엉엉 울었어요. ‘이거 실패인가 보다, 잘못 만들었나 보다’ 그러면서. <바람의 나라>를 세 차례 앵콜 공연으로 이끌어 낸, 불씨를 살려준 건 바로 관객들입니다. 지금 공연시장을 움직이고 있는 20대 마니아 여성들이 <바람의 나라>의 손을 들어줬고 예상치 않은 선전을 하게 됐죠.



대한민국에 던지는 물음표가 되는가. 2008년도까지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저에게 들어오는 작품은 무조건 했습니다. 작품을 기획하는 건 프로듀서고, 작품을 손에 잡기 전까지는 연출가에게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2009년에 들어오면서부터 작품이 들어오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봅니다. ‘지금 내 나이에, 연출 역할을 하는 문화인으로 도덕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맞는가’하고요. 굳이 지금 한국에서 이 작품을 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값어치 없는 작품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심각한 작품을 해야한다는 게 아니라, 현재 이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서 우리나라 공연계에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가라는 거죠. 가령, 2009 <바람의 나라>는 공연 단체에 대한 예산이 줄고 있는 현실에서 서울예술단의 자립을 위해 자체 배우들을 띄어보는 기회를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서울예술단 스스로 외부 도움 없이 작품을 올릴 수 있는가, 없는가를 시연해보는 캐스팅이 포함되어 있거든요. 대한민국 공연 예술단으로의 생존의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거죠. 명분 있는 선택과 시도가 되는 작업이 되는가에 대한 기준을 잡고 있습니다.



무모하지 않으면 변화가 아니다. 항상 변하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매 작품마다 제가 뭘 끄집어 내야 하느냐가 다르기 때문에 그 스타일도 그 때 그 때 달라지니까요. 한가지 분명한 건 저는 일을 굉장히 본능적으로 하는 편이고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면 무모하리 만큼 달려들면서 합니다. 그리고 수정한다거나, 남의 작품을 변형하는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생각이고요. 그냥 새롭게 만들어내고 말죠.

<록키호러쇼>는 컬트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시도였고, <헤드윅>은 콘서트형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장르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어요. <대장금2> 같은 경우에는 50부작의 드라마를 뮤지컬로 제작하려면 내용을 새롭게 얹어내야 한다고 말했고, 그 이야기가 받아들여져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늘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제 연출 스타일 입니다.



외강내유. 강점은 무모하리만큼 새로운 걸 좋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할 용기가 있다는 점이고, 약점은 판은 크게 벌여놓고 남들의 비난을 견디는 용기는 부족하다는 거죠. 트리플 A형이거든요. 적당히 판을 짜내고 적당히 두려워해야 하는데, 일을 벌일 때는 용감무쌍하면서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난과 손가락질에는 바로 울어버려요.

배우들에게는 굉장히 직선적인 편입니다. 연습실에선 워낙 무서운 사람으로 소문이 나서 저를 피해 다니는 배우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요즘엔 좀 부드럽게 대했더니, 배우들이 술자리에 모여서 ‘선생님 늙어서 약해졌다’면서 자기들끼리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빨래> 따뜻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특히 대사가 맛있어서 좋았습니다. 유머코드가 와 닿은 점도 좋았어요. 솔직히 해맑은 결론을 보면서 ‘솔롱고가 전신화상을 입고 눈물 흘리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실제 상황은 너무도 처절한데 우리 무대는 ‘우리는 행복해’라는 미국식 해피엔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런 심각한 화두를 던졌다면 전 중간에 나왔을 것 같아요. ‘어유, 내가 여기서도 이런 걸 봐야 해, 짜증나’ 이러면서. 우리나라 공연시장, 드림팩토리에 하나씩 대안을 내놓고 있는 창작뮤지컬 중 하나잖아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잘 봤습니다.

알차고 쓸모 있는 밑밥 역할. 나 하나 잘 먹고 잘살아 보자는 심보로 그냥 그때그때 스윽 올라가는 공연 말고요, 한국의 공연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안은 컨텐츠를 올리고 싶습니다.우리는 정말 뛰어난 민족인데 정치분야는 좀 아닌 것 같고, 예술분야에서 큰 몫을 해낼 것 같거든요.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은 작품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대안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내놓는 연출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뮤지컬 한 단계 발전했구나' 할 수 있는 시초가 되는 작품, 도전할 가치가 있는 컨텐츠를 보듬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관객에게.
공연연출가의 인터뷰를 클릭해서 보고 있는 당신, 이미 절반은 공연인 이십니다. 공연에 보내주시는 특별한 애정과 관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연출가 이지나 이름을 보고 클릭해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우리 공연계 사람들이 업고 다녀야 하는 보석 같은 존재거든요. 표를 끊고 공연장에 나타나주시는 것 만으로 감사한데 제가 뭘 더 바라겠어요, 더 이상 뭘 더 바라면 안되죠.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연출가 이지나의 작품을 만나러 올 관객들에게.
연출가 중에 유난히 안티가 많은 (마냥 듣보잡이 아닌 점, 무플 보다 좋긴 합니다만) 연출가 이지나 이름을 보고 찾아와주셨다는 것 만으로 감사하지만 ‘이지나 연출이 지금 이 짓을 왜 하고 있나’를 한번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지나가 이 배우에 꽂혔나봐’ 이런 대화를 즐기시는 것도 좋고 배우, 의상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이분법 이야기도 좋지만. 조금만 더 큰 눈으로 연출가의 의도를 헤아려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정리 :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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