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있다.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눈빛은 살아있는 억척스러운 여인네. 그녀 옆에는 전쟁 중 생계의 수단인 마차와 각각 아버지가 다른 세 남매가 있다. 그들은 종교전쟁으로 피와 살육이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술과 물품들을 팔며 살고 있다.

전쟁은 억척어멈에게는 삶의 기회다. 어지러운 틈을 타 병사들에게 생필품을 파는 게 세 자식들과 자기가 살 길. 하지만 또한 전쟁은 그녀에게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간다. 용감한 첫째 아들은 군인이 되기 위해 집을 나가 버렸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막내아들과 벙어리 딸은 전쟁 중 목숨을 잃는다.

억척어멈은 영민하게, 재빠르게 환경을 받아들이고 살아갔지만 전쟁의 비참함과 허무함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세 자식을 잃어버린 그녀가 선택한 건 무엇일까. 전쟁은 처음부터 선택권을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나 둘 그녀를 떠나갔지만 억척어멈은 여전히 마차를 끈다.

[억척어멈과 자식들]은 20세기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 받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대표작으로 유럽의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사극이다. 국내에서도 여러 번 무대에 올려졌을 만큼 탄탄한 원작으로 이번에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국내 참가작으로 관객들 찾아왔다. 인간의 미덕을 파괴시키는 전쟁과 그 속에서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억척어멈의 이야기가 김광보 연출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무대다. 무대는 마치 마당놀이를 하듯 객석이 무대 삼면을 감싸고, 배우들의 무대를 오르내림이 개방돼 무대 밖 배우들의 대기상태도 노출 했다. 조명은 빛뿐만 아니라 중요한 소품으로 쓰이며 수시로 위 아래로 움직이고, 모던한 공간은 상상력을 부추긴다. 배우들은 억척어멈인 문경희와 딸 황정화 이외에는 모두 일인 다역을 소화하고, 때로는 나래이션을 맡기도 한다. 특히 억척어멈 문경희는 가슴치는 아픔에 당황하고 목이 메이다가도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슬픈 어미의 모습을 뚜렷하게 표현해냈다.

[뙤약볕] [오이디푸스-그것은 인간] [한 여름밤의 꿈] [자베트] 등에서 독특한 해석력을 보여준 연출가 김광보는 이번 공연에서도 시대성을 최대한 지우고, 모던하고 심플하게 극을 진행하면서 집중성을 최대한 높였다.

이번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이 작품은 19일까지 서강대 메리홀에서 관객을 찾아간다. 진지한 서사 연극을 찾아보기 힘들어 진 요즘 [억척어멈과 자식들]은 무게감있고 새로운 연극을 갈망하는 관객들에게 참으로 반가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