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일 없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연대와 의리

< 라이방 >?.... 어쩐지 귀에 익은 제목이다.
그렇다. 이미 2001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2002년 3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시나리오 부분을 수상한 전력이 있는 영화이다.
흥행은 되지 않았으나, 상영 이후 < 와라나고 >다시보기 운동 -‘와니와 준하’,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 이 일어날 만큼 그 작품성만으로 이미 인정을 받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런 < 라이방 >이 제 4회 밀양 여름공연예술축제 젊은 연출가전에서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며 연극으로 선보였다.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도 튀어나온다더니, 좋은 이야기는 또 이렇게 어디서건 관객을 만나러 그 모습을 바꿔 뛰쳐 나오나 보다.

입만 열었다 하면 허풍이지만 사실은 겁이 많고 소심한 진상, 열 여덟 살에 낳은 딸을 남몰래 혼자서 키우고 있는 기진, 유일하게 대졸이지만 명예퇴직 후 택시기사를 하는 재범.

그들은 각기 다른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는 30대 후반에 접어든 별 볼일 없는 ‘택시 운짱’이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이들 세 사람이 누리는 유일한 낙은 단골 소주집에서 얼큰하게 술 한잔 걸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

그러던 중, 이들에게 농담 섞인 푸념만으로는 넘길 수 없는 각기 다른 고민거리가 생긴다. 진상은 잘못 선 빚보증으로, 재범은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기진은 아무도 몰래 키워 온 18살 딸의 유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회사 상무에게 빌려준 돈까지 모두 떼이고 만다. 절망에 빠진 세 사람. 고민 끝에 방바닥에 억대의 현금을 깔아 놓고 산다는 동네 할머니 집을 털기로 작정하는데...

결국 < 라이방 >은 파랑새를 찾아 떠나지만, 결국 집에 돌아와보니 우리집 새장의 파랑색이더라는... 그 동화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기회는 세 번 온다던데 초년을 지나 중년까지 이 기회가 안 온 사람들은 불안하다. < 라이방 >의 주인공들은 문득,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기회가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대범해진다. 그 대범함과 배짱도 사기를 당하고, 딸이 떠나가는 등의 현실에 떠밀려 생겨난 결심이지만 말이다.
<라이방>은 보통 사람들이 느낄만한 인생에 대한 배신감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남들은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일까?”라는 생각을 해봤다면, 극의 시작에서 < 라이방 >을 쓴 채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그 남자들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미 영화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을 연극으로 재 표현 해낸다는 것은, 연극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화법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연극 라이방 >은 영화의 색채를 쏙 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처음부터 연극이 더 어울리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단촐하기까지 한 무대에 삼단분리테이블과 이동식 병풍만으로 만들어내는 공간의 변화.
거기에 혼자서 진상의 바람파트너로, 재범의 속 끓이는 아내로, 기진의 18살 딸로, 술집 주인으로까지 극 속에 나오는 모든 여자배역을 혼자서 소화해내는 여배우의 다양한 연기스펙트럼을 보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여배우가 모자랐다거나, 제작비를 줄이려는 방책에서 나온 게 아닐까란 생각은 하지 말기로 하자.

< 라이방 >의 이야기는, 여자이야기로 허풍 떠는 내 술자리의 모습이며,
집에 돌아오면 그 신나는 허풍만큼 신나지 않은 내 가정의 현실이며,
절친한 친구에게조차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을 털어놓는...

내 속에 모조리 들어있는 나의 이야기이며, 대한민국을 사는 별 볼 일 없는 남성들의 연대와 의리 그리고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평범한 그들이 가장 배짱 좋게 저지른 도둑질이란 발버둥도 결국,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저 소심한 A형의 대명사 ‘표 간호사’가 오지명에게 대항했던 ‘대답 건성으로 하기’와, ‘몰래 다리 꼬기’같은 소심한 반항과 별반 다를 바 있을까?

그래서 영화의 결말로 실제 삶에서 가능한 행복의 제시로 보여졌던 베트남에서 둥지를 튼 모습보다는, 또 다시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연극의 결말이 훨씬 더 < 라이방 >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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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백성운(개그콘서트 작가 dov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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