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혹시 뮤지컬 <헤드윅>(원제: Hedwig and the Angry Inch)을 사랑하는 헤드헤즈이거나 그 공연을 유심히 보았던 관객이라면 헤드윅이 극 초반에 극장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을 기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어 공연 대본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존 카메론 미첼이 쓴 영어 원문 대본에서 발췌해서 직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중략) 여러분이 저의 특별한 개막 공연에 와주셔서 흥분되네요. 이곳 아름다운 호텔 리버뷰에서! 진짜 강을 볼 수 있는 곳! (중략) 이 그랜드 볼룸은 성역과도 같은 장소로 축복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답니다. 타이타닉호에서 구조된 선원들의 피난처였던 곳이거든요.”

사실 뮤지컬 <헤드윅>의 설정 자체가 헤드윅과 앵그리인치 밴드가 호텔 리버뷰(Hotel Riverview)의 그랜드 볼룸에서 첫 공연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호텔 리버뷰 건물은 미국 이민자들의 관문인 앨리스 아일랜드에 있는 이민국을 설계했던 윌리엄 보링의 작품으로 1908년에 선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갖추어진 ‘미국 해양인의 집’(American Seaman's Friend Society Sailors' Home and Institute)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중에서 언급된 것처럼 1912년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당시 생존했던 선원들이 임시로 수용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호텔은 맨하튼의 웨스트 빌리지 구역 안에서도 서쪽 끝인 허드슨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에 뉴욕의 신흥 부촌인 미트 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가 인접하다보니 소위 쉬크한 부티크 호텔로 변모했지만 헤드윅이 초연했던 1998년만 해도 외진 곳에 위치한 허름하고 작은, 이름만 호텔인 낡은 건물이었지요.

리버뷰의 기억

개인적으로는 헤드윅 공연이 열리기 한 해 전인 1997년에 그 호텔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여행차 뉴욕을 방문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저렴한 호텔을 찾고 있었는데 빌리지 보이스를 통해 독방이 하루 50달러라는 사실을 알고 한밤중에 방문했습니다.

결과는 흉흉했어요. 지하철역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은 매우 어둡고 위험해 보였고 을씨년스럽고 지저분한 호텔 로비는 물론 방을 보여주겠다며 앞장서는 흑인 매니저의 인상도 험악했습니다.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을 둘러보다가 바로 나와야 했습니다. 천장에는 거미줄에 앉은 거미가 환영해주고 있었고 침대에 앉아보니 용수철들이 온 몸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주었구요, 먼지 앉은 TV는 케이블도 아닌 실내안테나가 달린 13인치였습니다. 아 비열한 거리, 뉴욕...!


제인 스트릿 시어터 객석에 앉아 있는 존 카메론 미첼
하지만 이듬해 <헤드윅>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다시 찾은 그 호텔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공간처럼 느껴지더군요. 로비가 있는 1층의 그랜드볼룸은 나름 개조를 거쳐 257개의 좌석이 들어간 제인 스트릿 시어터(Jane Street Theater)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곳에 좌석형 극장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The Rock Hotel’, ‘Club Jane’이라는 이름의 나이트클럽으로 유명했었고, 극장으로 바뀐 것은 1970년대라고 합니다. 물론 극중에서 헤드윅은 그곳을 제인 스트릿 시어터가 아닌 ‘호텔 리버뷰 그랜드 볼룸’이라고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두 창작자인 존 카메론 미첼과 스티븐 트래스크가 이 작품을 객석이 있는 극장보다는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클럽과도 같은 비정형 공간에서 올리고 싶어했기 때문이겠지요.

극장의 태생이 나이트클럽이다 보니 내부 구조도 일반 극장과 많이 달랐습니다. 술을 파는 바(Bar)가 객석 바로 뒤편에 자리잡아서 공연 중에 음주가 가능한 것 정도는 애교였고, 화장실이 놀랍게도 무대 양 옆에 있었습니다. 공연 전 바에서 술을 마신 관객들은 끊임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되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선명한 분홍색의 화장실 조명이 새어 나오게 되죠. 이러한 기본 장치가 클럽형 공연을 원하는 창작자의 구상과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장치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정말이지 <헤드윅> 오리지널 공연은 프로시니엄이 번연히 있는 극장이었지만 여러 면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였네요.

12년 후, <헤드윅>의 흔적

얼마 전 다시 찾은 호텔 리버뷰는 정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과거형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동안 <헤드윅>에 대한 추억으로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잠시라도 들렀지만 이번의 변화는 좀 더 드라마틱하더군요. 호텔 부근의 하이 라인 파크(High Line Park:폐쇄된 고가 철길을 개조한 친환경 공원) 공사가 부분적으로 완공되었고 호텔 내부 또한 완전히 달라져있었습니다.


지금의 '더 제인 호텔'
첼시의 메리타임 호텔과 이스트 빌리지의 보워리 호텔의 소유주인 신 맥퍼슨과 레익 구디가 2008년 이 호텔을 타이타닉 시대를 컨셉으로 한 부티크 호텔로 재개발하면서 이름도 ‘더 제인 호텔’로 바꾸었습니다. 극장이었던 볼룸은 고급 바가 딸린 대저택의 거실같은 사교 라운지 공간으로, 헤드윅 팀의 분장실이었던 옥상의 펜트하우스는 술을 파는 곳(Rooftop Bar)으로 바뀌어 작년에 엄청난 나이트클럽 인파가 이 호텔을 찾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밤마다 소음 때문에 지역주민들과 큰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6층짜리 아담한 호텔이지만 객실수는 무려 200개에 이릅니다. 그 중 150개가 화장실도 없이 싱글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이른바 선원실(Crew's cabin)인데 하룻밤 99달러를 받는군요. 나머지 50개가 화장실이 딸려있는 선장실(Captain's cabin)이며 - 12년 전에 제가 둘러보았던 바로 그 방의 - 숙박비는 179달러랍니다. 선원실은 좁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공유하지만 다른 부티크 호텔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지요. (하지만 저라면 이곳을 숙소로 추천하지는 않겠습니다.)

로비에 들어서면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오른편에는 타이타닉 시대의 유니폼을 입은 프론트 클럭이 있고 왼편에는 노리타 지역의 터줏대감 격인 카페 지탄(Gitane)이 지점을 냈죠. 변하지 않은 건 외관 뿐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6층 건물 위에 있었던 붉은 등대만이 철거되었을 뿐, 여전히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네요. 하지만 그 등대야말로 선원들에게 뉴욕에 돌아왔음을 알려주던 따듯한 불빛이 빛나던 곳이었는데 말이죠.

헤드윅을 다시 추억하며

뮤지컬 <헤드윅>은 제인 스트릿 시어터, 아니 ‘호텔 리버뷰 그랜드볼룸’에서 1998년 발렌타인 데이에 개막해 그 후 2년 동안 857회라는 장기 공연을 이끌어내며 많은 사람들을 허드슨 강가로 이끌었습니다. 1980~90년대에는 이 지역이 젊은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로 곧잘 이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어찌보면 <헤드윅>은 이곳이 고급 주거지로 개발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불살랐던 보헤미안의 용광로와도 같은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존 카메론 미첼은 공연 기간 동안 호텔 리버뷰의 화려하진 않지만 아늑한 펜트하우스를 분장실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그의 모습은 영화 ‘헤드윅’ DVD안에 수록되어있는 인터뷰 영상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가 매일 바라보았을 허드슨 강은 게이 커뮤니티의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이 극장에 인접한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의 단골 데이트 코스가 바로 허드슨 강변이었으니까요. 존 카메론 미첼은 자신의 호텔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굽어볼 수 있었겠죠.

허드슨 강 너머에 있는 (실제로는 육안으로 볼 수는 없는) 자이언트 스타디움에서는 토미 노시스의 콘서트가 열리죠. 아쉬운 마음이든, 설레는 마음이든, 허드슨 강을 내려다 본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에 대한 중요한 의식과도 같은 행위가 되지 않을까요? 세상은 빠르게 변합니다. 그 변화를 막을 수도 과거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워 하는 것만큼은 우리가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추억입니다. 헤드윅을 보며 이제는 사라진 그곳을 함께 그리워 해주시겠습니까?


The Jane Hotel
주소 : 113 Jane Street, New York, NY 10014 (지하철 A, C, E 노선 14th St.)
전화 : (212) 924-6700
홈페이지 : www.thejanenyc.com

더하기 하나!
<헤드윅>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선 김에 한군데 더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첼시(6~7번 애비뉴 사이) 17번가에 위치한 웨스트베스 극장(WestBeth Theatre Center)입니다. <헤드윅>은 1994년부터 ‘스퀴즈박스’를 비롯해 뉴욕 빌리지의 수많은 게이클럽에서 드랙(Drag:쇼의상을 갖춘 여장남자) 콘서트로 출발해 점차 대본이 있는 뮤지컬의 형식을 갖추어가다가 바로 이곳에서 1997년 초, 워크숍 공연을 갖게 되었고 그 성공으로 인해 이듬해 호텔 리버뷰에 장기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극장은 1977년부터 에디 이자드, 마이크 마이어스, 마가렛 조, 존 레귀자모 등 미국의 대표적인 솔로 스탠딩 코미디쇼를 다수 제작한 곳이기도 하고 현재도 꾸준하게 클럽형 쇼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사진: 더 제인 호텔 홈페이지, 영화 헤드윅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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