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공연예술 축제
2008 에딘버러 페스티벌 결산

고색창연한 도시, 에딘버러, 장엄하게 절벽 위에 우뚝 솟은 고성과 수 백 년의 세월을 담은 웅장한 건물이 즐비한 그 곳에 도착하면, 해리 포터의 이야기가 거기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마차가 지나갈 것 같은 낡은 중세의 돌길, 낮고 좁은 골목 사이에 담겨있을 수많은 세월과 사연들. 그래서인지 에딘버러의 여름은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는 페스티벌로 가득하다.

공연예술단체이면 국적, 나이, 연륜, 장르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가 가능한 자유참가형식의 축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트벌은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의 공연예술제를 자랑하고, 오페라, 발레, 연극 등 세계 최고의 공연예술을 소개하는 에딘버러 인터네셔널 페스티벌은 예술성 면에서 세계 최고의 공연예술제를 자랑한다. 이외에도 사람과 장소와 아이덴티티와 마이너리티 문화를 주제로 한 작은 축제, 멜라 페스티벌, 문학축제라고 할 수 있는 북 페스티벌, 세계 군악대 콘서트인 에딘버러 밀리터리 타투, 음악축제인 재즈 페스티벌 까지 총 7개의 축제가 8월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리하여 에딘버러의 여름은 거리 곳곳에 거리 홍보를 나온 배우들과 포스터와 전단이 즐비하고, 에딘버러 대학의 강당과 강의실은 모두 공연장으로 탈바꿈한다.

특히 에딘버러 인터네셔널 페스터벌과 함께 올해로 61회째를 맞이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입장권 판매가 150만장을 이상을 기록하는 대형공연축제다. 8월 중 3주간(8.3-25) 1인 코미디에서부터 30명이 출연하는 뮤지컬까지 규모와 장르가 다양하고 아마추어에서부터 스코틀랜드 국립극단까지 다양한 수준의 공연을 1000편이 넘게 선보인다. 참가작을 선정하는 절차가 없이 누구나 원하면 참가할 수 있는 행사이기에, 자칫 공연 제목만 보고 찾아갔다가 형편없는 아마추어 공연을 보고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대로 젊은 신생 극단의 참신한 신작을 목격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프린지 축제의 유명세를 만들어 내는 이유다. 알려지지 않은 극단이 선보이는 창작극이 3주 만에 비평가의 찬사와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동시에 얻으며 에딘버러에서 우수 공연으로 인정받고 세계 각국의 투어 제의를 받게 되는 것. 많은 공연자들이 이러한 공연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에딘버러로 향하고, 극장장이나 축제 감독들은 그런 작품을 찾으러 에딘버러로 향한다.


청소년들의 혼돈, <우리가 누군지 지금 딱 한번만 말해 줄 테니까 입 닫고 잘 들어> <365>
올해 1000편이 넘는 공연 중에 이러한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팀은 벨기에의 온트로에렌트 고에드 극단(Ontroerend Goed)과 리차드 조던 프로덕션(Richard Jordan productions)였다. <우리가 누군지 지금 딱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까 입 닫고 잘 들어 (Once and for all we’re gonna tell you who we are so shut up and listen)>이란 긴 제목의 작품으로 실제로 10대인 13명의 어린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 때리고 욕하고 싸우는 사춘기의 혼돈을 실감나게 표현하여 화제를 얻으며 각종 시상식에서 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비디오 클립 http://www.youtube.com/watch?v=irL5XeAikxw).

에딘버러의 연극작품들은 매년 각종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사회정치극들이 화제를 모으는데,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 역시 전쟁이나 정치적 현안을 다룬 정치사회극이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청소년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스코틀랜드의 국립극단에서도 인터네셔널 페스티벌을 통해 <365>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소년원에서 출감하여 자립을 시작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에딘버러 플레이하우스의 대형무대에서 감각적인 무대미학을 자랑하며 공연된 이 작품 역시 기성세대는 한 명도 출연하지 않고 어린 배우들만을 기용하여 사춘기 청소년들의 고민들을 고백 형식으로 심도 있게 풀어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30명도 넘는 출연진이 아파트 문을 통해 데모하는 군중들 마냥 몰려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 사회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힌 저 많은 젊은이들을 기성 세대들이 어떻게 제대로 이해해야 할까 하는 묵직한 부담이 손에 만질 듯이 다가왔다.
 
연극부문에서는 창작극 전용극장인 트레버스극장(www.traverse.co.uk)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영국의 대표 전문극장들인 로열셰익스피어극단, 버밍험레퍼토리극단, 스코트랜드국립극단, 로열코트극장, 알마이다극장, 그리고 아일랜드의 국립극장인 애비극장 등이 신작을 선보였다. 이 중에서는 <아키텍팅 (Architecting)>, <깊은 상처(Deep Cut)> , <슬릭 (Slick)> 등 총 7편의 연극작품이 우수창작극에 수여되는 프린지 퍼스트 상을 수상하며 트레버스극장의 명성을 지켰다. 또한 프린지의 대표 공연장인 플레상스(http://www.pleasancepages.co.uk/), 어셈블리(http://www.assemblyfestival.com/) 등에서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코미디 공연과 함께 화제가 된 사회정치극을 선보였다. 그 중 2차 세계대전의 참사를 가족사를 통해 잔잔하게 전하는 <인버네스의 재단사 (The Tailor of Inverness)>와 홈리스들의 현실을 그린 <카라반 (The Caravan)>, 사무실의 단조로운 일상을 통해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페이퍼웨이트(paperweight)> 등이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에딘버러에서 웨스트엔드로
뮤지컬 부문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조지 스퀘이 극장이 뮤지컬 전용관으로 문을 열어 29편의 다양한 뮤지컬을 선보였고,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영국뮤지컬협회, MTM:UK 뮤지컬 시상식을 통해 참신한 신작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시카고 셰익스피어 극단의 신작 <펑킷 업 어바웃 낫띵 (Funk It Up About Nothin')>이 흑인 특유의 다이나믹한 랩과 훌륭한 유머감각으로 최우수 뮤지컬작품상을 수상했다 (작품정보 및 비디오 http://www.chicagoshakes.com/main.taf?p=2,19,3,3). 작품을 만든 젊은 래퍼, Q 브라더즈는 2000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역시 셰익스피어 작품을 소재로 한 <실수연발 (The Bomb-itty of Errors) > 라는 작품을 선보인 후 에딘버러를 거쳐 웨스트 엔드에 진출한 경력이 있다. 올해 선보인 작품 역시 조만간 웨스트엔드 콜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작품에는 한국계의 여배우 스테파니 킴이 여주인공 히로로 열연해 관심을 모았고 많은 한국관객들의 격려를 받았다.

로열마일에서 사무라이 코미디를 홍보하는 일본 배우들

뮤지컬 부문의 또 다른 스타로 신생 뮤지컬단, 헨&치킨극단의 <이발소오페라 (Barbershopera)>가 포복절도 패러디 오페라 스타일의 뮤지컬로 최우수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다. 남성 4인조 중창단이 유럽의 바버숍오페라 콘테스트에 출전을 앞두고 주요멤버 한 명이 사라지면서 겪게 되는 우여곡절을 다룬 작품으로 즉흥에 가까운 오페레타식의 랩과 휼륭한 유머감각이 폭소를 자아내는 작은 뮤지컬이다. 남자 셋 여자 하나의 앙상블이 훌륭한 팀워크을 이루어낸 이 작품은 특히 한국 오디뮤지컬의 신춘수 대표가 한국인 최초로 후원하고 심사한 ‘우수 창작뮤지컬을 위한 오디뮤지컬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다.

세계최대의 아트 마켓
이외에도 조지스퀘어에서 공연된 소형뮤지컬 <공항라운지 (Departure Lounge)>가 젊은 4인 남성밴드를 탄생시키며 우수음악상을 수상했다. 또한 30명의 출연진 및 오케스트라를 자랑한 대형뮤지컬, <용감한 자만이 (Only the Brave)>는 <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 스타일의 장중한 무대와 음악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타일의 전쟁 휴먼 스토리를 접목하여 화려한 무대를 선보였다 (작품정보 및 비디오 http://www.onlythebrave.co.uk/). 특히 사망통지서를 작성하는 타이피스트 5-6명이 일렬로 무대에 앉아 상상의 타자기를 작동하면서 가슴 절절한 사연을 전하는 뮤지컬 넘버는 감동을 자아냈다. 캐스트에 있어서도 최근 TV 뮤지컬 오디션에서 2위를 차지했던 키이스 잭 (뮤지컬 <조셉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 Any Dream Will Do)과 니엄 페리 (뮤지컬 <올리버>를 위한 TV 오디션 프로그램 I’d Do Anything)를 기용해 기대를 크게 모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다소 부실한 스토리라인과 80년대식 작품 스타일로 관객들의 열띤 호응에도 불구하고 현지비평가들의 악평 세례를 받으며 미래가 불투명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신체극은 올해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지난 6년간 신체극 전용 공연장으로 찬사를 받아 온 오로라노바 극장이 올해 재정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신체극 작품들의 수가 줄었고, 그나마 여러 극장을 분산되어 공연되면서 크게 주목 받는 작품이 없었다. 이미 작년에 공연되었던 <팩토리 (The Factory)>가 올해 재공연으로 최우수 신체극의 자리를 지켰고, 토탈씨어더 시상식을 통해 트레버스극장에서 공연된 작품들이 몇 몇이 다시 한 번 축하되었다. 앞서 소개한 벨기에 청소년극 <우리가 누군지 지금 딱 한 번만…….>가 실험적이고 혁신적 작품으로 선정되었고, 역시 트레버스에서 공연된 <천치들의 식민지 (The Idiot Colony)>, <아키텍킹 (Architecting)> 등이 신체극상의 다른 부문을 수상했다.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는 올해 유난히 비가 잦은 쌀쌀한 날씨와 미국과 영국의 경제불황, 올림픽 게임 등 악재가 겹쳐 지난 8년간 급증하던 공연 수와 관객 수가 모두 주춤했다. 더구나 축제 직전 티켓판매 전산망이 다운되면서 4만장에 달하는 예매티켓에 혼선이 빚어지는 불상사가 있은 후 관객수는 예년 수준에 그쳤고 실제로 거리의 인파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이로 인해 축제가 끝나자 마자 작년 여름 축제감독으로 부임했던 존 모건(Jon Morgan)은 1년 만에 사임을 표명하는 안타까운 사태를 낳았다. 하루 빨리 새로운 리더를 찾아, 세계 최대의 아트마켓인 에딘버러 프린지가 내년부터 다시 최고의 신작을 낳는 산실로 재탄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정명주 (연극/뮤지컬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