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에딘버러는 경제난 속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성공적인 티켓판매율을 기록하며 또 한 번의 성장신화를 이루었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 물 오른 연극

명작초청무대인 에딘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8.14-9.6)은 드물게 연극작품들을 매진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페스티벌 기획작품인 연극, <마지막 마녀(The Last Witch)>는 공연이 시작하기도 전에 658석의 리시움극장의 전 8회 공연이 완전 매진되는 사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고, 루마니아시비우국립극단의 <파우스트(8.18-21, 비디오 http://www.eif.co.uk/faust)>, 남아프리카 핸드스프링인형극단의 세계적인 인형술을 자랑하는 오페라 <율리시즈의 귀향(8.23,25-26, 비디오 www.eif.co.uk/handspring)> 등도 완전매진을 기록해 공연 직전까지 반환티켓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실제 공연평과 관객반응은 엇갈렸다. <마지막 마녀>는 비평가와 관객들에게 모두 실망을 안겨주었고, <파우스트>의 경우는 관객반응은 좋았던 데 비해, 비평가들의 평이 엇갈렸다. 오페라 <율리시즈>의 경우에는 인형을 활용하는 전문성과 창의력을 들어 평론가들에게 최고점을 받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못했다.


<마지막 마녀>, Photograph: Murdo Macleod
화려한 군중씬을 자랑하며 90년대를 풍미했던 루마니아의 연출가, 실비우 푸카레트는 경제난국에도 아랑곳 없이 다시 한번 대량물량을 동원한 스펙테클을 선사하며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의 최고화제작을 만들어냈다. 공항 근처의 격납고 건물인 로우랜드홀 안에 마련된 <파우스트>의 임시무대는 보통 대극장과 다름없는 크기의 무대가 허름하다. 무대 위엔 낡은 신문지 뭉치가 사방에 널려있고, 전체적으로 허연 회벽색의 낡은 교회당 내부를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고뇌에 찬 늙은 파우스트(일리에 게오르게[Ilie Gheorghe])는 작업복에 가까운 낡은 옷차림이고 교회벤치처럼 생긴 긴 의자에 빼곡히 앉은 그의 학생들도 집단수용소의 유니폼에 가까운 헐렁한 파자마 차림이다.

파우스트가 평생 쌓아온 학식은 낡은 신문지 더미에 지나지 않고, 열심히 그의 강의를 노트북 컴퓨터로 받아 적는 학생들은 대량생산되는 아카데미의 영혼 없는 산물일 뿐이다. 그러한 파우스트가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며 자살을 기도하는 순간, 메피스토의 방문이 시작된다. 여배우 오펠리아 포피(Ofelia Popii)가 열연한 메피스토 역시, 전체적인 작품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세파에 찌든 데카당스 버전의 악마로, 차갑고 악마적인 기존의 이미지 에 비해 처절하고 처연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극중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와 협상이 시작되는 순간, 갑자기 무대 뒷벽이 열리면서 숨겨져 있던 엄청난 크기의 제2의 무대가 나타난다. 바로 지옥이다. 영혼을 잃은 수많은 몸뚱아리들이 불지옥에 뒹굴고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지옥. 이제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를 가로질러 그 지옥으로 인도된다. 온몸에 피 칠을 한 스킨헤드의 배우들이 뛰어다니는 정신 없는 난장 속으로. 그 참혹한 공간 속에 관객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줄을 서게 된다.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저 세상에 막 도착해, 이미 죄값을 치르고 있는 다른 영혼들의 고통을 가만히 지켜보야 하는 것 마냥. 그렇게 공연 <파우스트>는 엄청난 물량공세로, 눈뜨고 보기 민망한 처절한 몸부림을 연기하는 배우들로 관객들을 경악시켰다. 마치 두 시간의 잊을 수 없는 악몽처럼.

<파우스트>, 파우스트 역의 일리에 게오르게
메피스토를 열연한 여배우, 오펠리아 포피, Photograph: Murdo Macleod

프린지 페스티벌 - 틀을 깨다

자유참가형 축제인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8.7-30)에는 올해 기존의 연극적 관습을 깨는 무대 밖의 연극,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다양한 방식의 연극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그래서 에딘버러의 하루는 엽기적인 사건들의 연속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한시 반, 점심 무렵 호텔에서 갑자기 몸 검색을 당하고, 테러를 운운하는 직원한테 점심으로 사놓았던 샌드위치를 뺏기고, 회의실에 불려 가서 호텔직원 면접 보는 자리에서 조언을 강요당하고, 피트니스 센터에 끌려가 10초 만에 ‘정신이상’ 진단을 받고 병원으로 끌려갈 뻔 했다 (공연명 <호텔> 공연장소: 퀸즈스트릿의 4층 건물).

겨우 이 이상한 호텔을 빠져 나와 오후 3시경 좀 더 그럴싸해 보이는 다른 호텔로 갔다가 졸지에 유럽 청년과 스피드 데이트를 했고, 둘만의 속 깊은 대화 후, 나름 눈이 맞아 포옹도 했으며, 며칠 후 집에 오니 유리라는 이름의 그 청년에게 편지까지 와 있었다(공연명 <인터널>, 공연장소: 포인트 호텔). 졸지 데이트 끝에 마음이 산란하여 저녁 먹고 밤 10시쯤 식물원에 산책을 갔더니, 그 조용하던 공원이 번쩍이는 조명이 난무하는 환타지 정글로 돌변해 있어 경악을 금치 못했고, 앞도 잘 안 보이는 컴컴한 식물원 안에 길을 잃고 헤매는데 사방에 이상한 벌레소리, 짐승소리가 들려 마음이 더욱 산란해졌다 (공연명 <파워 플랜트>, 공연장소: 로열 보타닉 가든). 자정이 가까운 시간, 지친 몸으로 집에 오는데 갑자기 나타난 괴한한테 눈가림을 당한 채 재판장에 끌려가 영문 모를 심판을 받았다 (공연명 <심판>, 공연장 C-soco 극장 내의 버려진 스튜디오).

스피드 데이트 공연 <인터널>, Photograph: wim vandewalle

가짜 호텔 방문체험기를 제공하는 공연 <호텔>, Photograph: Murdo Macleod

식물원 설치공연 <파워플랜트>, Photograph: Murdo Macleod
(왼쪽 상단, 시계방향으로)

에딘버러 프린지의 2000편이 넘는 공연 중에는 물론 공연장안의 연극들이 수적으로 훨씬 많았다. 최고의 호평과 인기를 누린 우수연극작품들을 들자면, 인기극작가 데이빗 그레이그 작품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남녀의 하룻밤을 노래와 함께 보여주는 로맨틱코미디, <미드 섬머 Midsummer>, 범죄가 횡횡하는 이 시대, 범죄자를 동생으로 둔 누나의 팍팍한 삶을 그린 웰메이드 연극 <고아들(Orphans)>, 배우 다니엘 킷츤의 스토리텔링이 훌륭했던, 우울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그레고리 처치의 길고 긴 자살시도 The Interminable Suiside of Gregory Church>, 유명작가 마크 레이븐힐이 쓰고 직접 출연한 <3막짜리 인생, The Life in Three Acts>, 서커스 기술을 활용한 산뜻한 무용 <레드 룸(The Red Room)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창작극의 산실인 트레버스 극장의 작품으로, 올 축제기간 동안 이 극장의 공연작들이 받은 연극상만 총 19개에 달한다.

우수창작극의 메카, 에딘버러 트레버스 극장 전경
소극장 로맨틱코미디의 진수를 선보인 공연 <미드 섬머>는 에딘버러 축제기간에 벌어진 가상의 러브 스토리이다. 변호사 헬레나는 데이트 약속이 펑크가 나자 혼자 늘 가던 바에 가서 와인을 한 잔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도난차량을 매매하는 어설픈 지하조직의 하수인인 밥은 차 판 돈을 받으러 생전 가지 않던 고급 와인 바에서 들른다. 술친구가 필요한 헬레나가 밥에게 접근하면서 시작된 두 사람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했는데 운명은 그들의 마음과 달라서, 다음날 동생 결혼식에 숙취로 인해 망가진 몰골로 나타났던 헬레나는, 수천 만원의 현금을 비닐봉지에 들고 땀 범벅이 되어 뛰어가던 밥과 다시 마주친다.

결혼식장에서 토하다가 쫓겨나다시피 한 헬레나, 은행이 문을 닫아서 거액의 현금을 수습할 길이 없는 밥, 둘은 결국 다시 뭉치고,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엽기공연을 보러 갔다가 밧줄에 묶여 매달리고, 와인가게를 통째로 빌려 와인파티를 하고 어찌하다 보니 하루 만에 삼천 만원이 넘는 돈을 다 써버리는데…… 두 인물의 솔직 담백하면서도 코믹한 독백형식이 주를 이루는 공연은 1시간 반, 쉴새 없이 인물들의 속마음과 머리 속의 상상을 일일이 관객들에게 토로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헬레나로 분한 코라 비셋(Cora Bissett)과 밥 역을 맡은 매튜 피전(Matthew Pidgeon)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과 노래로 빛을 발했다.

최고 인기의 소극장 로맨틱코미디 <미드섬머>, Photograph: Douglas Robertson

웰메이드 희곡 <고아들>
조 암스트롱, 클레어-루이스 코드웰, 조나싼 맥기네스, Photograph: Simon

같은 극장의 연극 <고아들>은 우아한 저녁식사에 피투성이가 된 남동생이 뛰어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스릴러형의 연극이다. 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내려는 누나와 매형의 질문 앞에 넋이 나간듯한 남동생의 증언은 매번 버전을 달리하고, 결국 매형은 경찰의 눈을 피해 처남의 실수를 덮기 위해 범죄현장에 가담하게 된다. 고요한 한 부부의 일상 속에 찾아 든 범죄의 여파는 결국 온 가족을 파멸로 몰아가는데… 소름이 돋는 긴장감, 시시각각 상황이 달라지는 긴박감, 어떻게든 동생의 죄를 덮고 사건을 무마하려는 누나(클레어-루이스 코드웰 분)의 처절함이 연극성을 더하는 수작이다.

신체연극 작품 중에는 두 페인트공이 절묘한 콤비로 몸싸움, 디제잉, 비트박스, 힙합 배틀을 하는 공연 <쓰레빠 힙합: 모든 일은 쉬는 시간에 생긴다(Flhip Flhop: Everything Happens on the Break )>), 성공지향의 오피스를 배경으로 한 직장인의 성공과 사랑, 좌절과 허무를 그린 고골의 심오한 원작을 비주얼 신체극으로 풀어낸 게코 극단의 <오버코트>, 늙그수레한 중년의 프랑스 기계공 아저씨들이 파이프, 튜브, 못, 망치, 나무막대기, 고무풍선 등 손에 닥치는 대로 주변의 연장을 이용해 브라스 밴드 연주와 함께 즉흥 음악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콘서트 <블로칸테 소노레: 기계공들(Brocante Sonore: The Mechanicians)>가 크게 인기를 모았다.

두 코미디언의 콤비가 절묘한 <쓰레빠 힙합>

게코 극단의 심오한 비주얼연극 <오버코트>,  Photograph:Marylin Kingwill

<블로칸테 소노레: 미케니션즈>, Photograph (c) DR
(왼쪽 상단, 시계방향으로)

메인 메뉴의 아쉬움, 다채로운 메뉴

조지스퀘어극장을 중심으로 한 뮤지컬 공연 중에는, 관객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만들어 가는 즉석 뮤지컬 <쇼스타퍼(Showstopper)>가 매회 전혀 다른 버전의 포복절도 코미디를 선사하여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다. 혹시 정해진 포맷이 있나를 의심하며 다섯 번 이상 보러 갔다는 관객도 있었지만, 매회 전혀 다른 제목과 스토리, 음악으로 관객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한국의 오디 뮤지컬에서 협찬하기도 한 영국뮤지컬협회 MTM의 뮤지컬 시상식에서는 여러 창작 뮤지컬 등이 다양한 장르, 소재를 내세우며 경쟁했다. 손에 꼽을 대표작은 없었지만 다양한 창작극들이 선전했다.

청혼을 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코마에 빠져버린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서정적인 선율의 로맨틱러브스토리로 그려 낸 <뮤지컬 에드(Ed - The Musical)>가 최우수신작뮤지컬상과 대본상을 받으며 큰 인기를 얻었고, 작년 ‘오디뮤지컬 신작뮤지컬상’을 수상했던 아카펠라 뮤지컬팀, 이발사오페라가 다시 한 번 <바버쇼페라 제2탄(Barbershopera II)>으로 더욱 발전된 스토리의 코미디를 선보여 작사상을 수상했다. 한편, 옆 집에 이사온 커플과 스와핑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젊은 부부의 이야기, <문턱을 넘어서 (Over the Threshold)>가 잔잔한 스토리와 세련된 음악으로 음악상을 수상했고, 장기방영 텔레비전 드라마 출연진들간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코미디, <위대한 영국 드라마 (The Great British Soap Opera)>가 흥미진진한 텔레비전 백스테이지 스토리와 코믹한 앙상블 연기로 심사위원상의 영예를 안았다.

즉흥뮤지컬 <쇼스타퍼>

아카펠라 뮤지컬코미디 <바버쇼페라 제2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티켓전산망 다운으로 인한 작년의 실패를 만회하며 무려 21% 성장을 기록해 세계최대규모의 예술축제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 번 굳혔다.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만, 무려 265개 공연장을 통해 총 2,098개 작품을 선보이며 총 34,265회의 공연을 올렸고 티켓판매량은 1,859,235장에 달했다. 이제까지 최고기록이었던 2007년 수치와 비교하면 9% 정도 성장한 셈이다. 올해 에딘버러의 공연들은 수적인 면에서의 성장, 그리고 새로운 소재,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는 창의성과 도전정신 면에서는 성장을 기록했지만, 예년처럼 모든 상을 휩쓸면서 독보적인 최고인기, 최고평을 누리며 떠오른 신예극단이나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차려진 밥상은 나름 새로운 메뉴들로 풍성해 보였으나, 막상 손이 가는 음식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매번 새로운 메뉴가 등장하는 것, 그래서 매번 새로운 것이 바로 에딘버러 프린지페스티벌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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