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두 노인. 옆집 사는 이웃에게 하는 말처럼 주거니 받거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퍽 정겹다. 남편이 없는 사이 복잡한 집 계약을 하느라 혼이 나갔었지만, 화단을 꾸미는 건 정말 즐거웠다는 여자. 중동으로 돈 벌러 나가있는 동안 아내가 한없이 자기를 기다려줬다며 행복했고 또 고마웠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남자. 그렇다. 이들을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둘이 함께 보내온 시간을 이야기하는 부부다.

배삼식 작가, 김동현 연출의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에서 이제는 늙어 머리가 새하얀 여자는 기억의 질서를 놓쳐버렸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어 기억과 망각의 선을 넘나드는 아내와 때때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 곁에서 차근차근 말을 맞춰주는 남편의 모습이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뒤죽박죽 섞여 그저 툭, 툭 풀어내는 아내의 기억의 파편들은 이들 부부가 살아온 지난날의 회한에 멈추지 않는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건강을 잃어가며 일하던 70년대 봉제 노동자들, 저마다의 꿈을 품고 독일로 떠나던 간호사들과 거친 모래바람을 맞으며 그저 성실한 일꾼이 되어 가족들과 오랜 이별을 마다하지 않던 중동 건설 인력들. 그리고 2003년 일어난 대구 지하철 참사까지 두 부부의 개인사는 이렇듯 굴곡이 많아 그림자도 짙은 한국 현대사와 길을 같이 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삶이기에 애써 버텨냈지만, 결국은 오랜 시간 속의 아픔과 상처, 절망의 순간들이 너무나 지쳐버린 이 여자의 기억과 망각의 순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인간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나 빨리 잊어버리고, 잊어도 좋을 일들은 끝끝내 가슴에서 끌어내리지 못해 저마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잊었다면 더욱 편안한 오늘이 되었을 법한 기억들의 분절, 그 사이 남모를 울음을 삼키는 남편의 모습은 어쩌면 '먼 곳'이 아닌, 아직도 여전히 '가까운' 우리 사회가 낳은 아픔들이자 우리의 모습이겠다.

개인사와 한 나라의 시대사를 이질감 없이 대단히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녹여낸 이야기 역시 탁월하며, 신파나 급진적인 의견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잔잔한 파도와 같은 서사의 목소리는 짙은 파도거품을 일으켜 객석을 흠뻑 적신다. 2인극으로서 남자 역의 이대연과 여자 역의 이연규가 선보이는 균형 잡힌 열연은 좋은 희곡이 좋은 배우를 만나 어떠한 완성도를 이뤄내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간 <말들의 무덤> <디 오써> 등 '언어'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과 집중으로 풀어낸 작품 뿐 아니라 <하얀앵두> <벌>에서 배삼식 작가와 밀도 높은 호흡을 보여준 김동현 연출의 힘이 무엇보다 이 작품을 아우르는 중심 축이다. 소극장 무대 위에 공원 의자와 가로등 하나, 휠체어와 연결된 자전거 등 단출한 소품과 무대 장치는 이야기를 번잡스럽게 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조화 역시 완벽하다.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오는 일요일까지만 공연한다는 점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코르코르디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