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어?”

뉴욕 여행 일정을 궁금해하는 지인에게, 올해 초 한국에서 초연된 프러덕션을 토대로 뉴욕에서도 첫 선을 보이는 <드림걸즈> 관람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건 분명 실수였다. 남은 연차 소진을 위해 뉴욕에 가겠다고 했을 때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돌아온 건 조소. “그럼 그렇지, 가야 할 시집은 안 가고 11월에 느닷없이 뉴욕에 간다더니 거기까지 가서 고작 한다는 게 업무의 연장선상인 거냐?”

젠장, 공연 담당을 너무 오래 한 게다. 문화부에서 산업부로 적을 옮기며 완전히 자유로운 시선으로 연극과 뮤지컬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공연 관람은 다시 취미가 됐다며 기뻐했던 나다. 새로운 보직에 이전 업무도 놓지 못하는 ‘프릭’(freak)의 이미지는 진정 예상 못했던 바. 하기야 지난 2년간 연극ㆍ뮤지컬에 온 정열을 쏟았다. 게다가 한국에서 이미 세 차례나 관람한 <드림걸즈>를 먼저 내뱉은 꼴이라니. 미련하긴 했다.

하지만 이전에 세 번을 보았든 열 번을 보았든, 이번 여행길에 <드림걸즈>를 다시 관람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직 공연 담당 기자의 자격을 떠나 이건 분명 한국인이라면 경험해 볼만한 가슴 벅찬 자리였다. 대부분의 크리에이티브 인력이 미국인으로 채워졌지만 어쨌거나 신춘수 오디뮤지컬컴퍼니 대표가 공동 프로듀서로 제작에 참여, 한국에서 먼저 선보였던 바로 그 작품. 이에 뒤늦게(?) 열광하는 뉴욕 관객을 바라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웠다.

뮤지컬 <드림걸즈>의 첫 장면에서 ‘드림스’의 데뷔 무대로 소개된 뉴욕 할렘가의 아폴로씨어터. 올해로 75주년을 맞은 역사적인 장소다. 11월 7일부터 시작된 <드림걸즈>의 프리뷰가 한창인 극장 앞은 공연 1시간 전부터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LED 패널 5장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감탄을 자아냈던 한국에서의 그 화려한 무대를 그대로 옮겨 오고, 여기에 흑인 특유의 감성적인 가창력까지 더한 공연은 전에 없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기립으로 화답한 관객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앞뒤ㆍ좌우에서 공연 중 끊임없이 파트너에게 “I love it” “Fantastic”을 속삭이던 관객들은 이례적으로 에피의 ‘And I am telling you I’m not going’이 끝난 직후, 그러니까 1막이 완전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기립 박수로 공연의 만족감을 표했던 터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 서울 공연과 배우만 달라진 것뿐인데 관객의 반응은 왜 이렇게 달랐던 것일까. (한국 공연은 뮤지컬 시상식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객석의 반응은 예상만큼 폭발적이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다.) 몇 가지 중요한 배경이 작용했다.

우선 의도적으로 누그러뜨렸던 원작의 흑백 인종 갈등이 전면 부각됐다. 흑인 소녀 트리오 ‘드리메츠’가 전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거듭난다는 이야기의 설정과 제임스 브라운, 모타운 아티스트 등 수많은 흑인 예술가를 배출한 할렘의 아폴로씨어터라는 공간의 만남은 그래서 더 큰 의미가 있다.

극 중 제임스 썬더 얼리가 백인 무대에 본격 진출하며 ‘베이베’(babe)라는 애칭을 ‘베이비’(baby)로 바꿔 부르는 것만으로도 객석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은 분명 한국 공연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던 부분이다.


이와 함께 뮤지컬 관객이 집중되는 맨해튼의 미드타운(midtown)과는 다소 떨어져 있긴 하지만, 최근 브로드웨이에 신작이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1981년 초연작인 뮤지컬 ‘드림걸즈’의 새로운 버전인 이번 공연은 ‘씨어터고어’(theatergoer)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42번가 타임스퀘어를 중심으로 위치한 여러 극장에 중ㆍ장년층 관객과 아시아, 남미 지역의 관광객이 몰리는 것과 달리, 신작 <드림걸즈>가 궁금해 프리뷰 기간에 일부러 할렘까지 찾아온 뉴요커들이 유난히 멋스러운 트렌드 리더로 보인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무엇보다 공연의 힘은 역시 배우라고 했다. 한국 공연도 뛰어난 가창력을 자랑하는 최고의 배우들이 선전했지만 뉴욕 무대에서 만난 에피, 커티스 등의 중량감은 이전 한국 공연의 잔상을 완전히 지울 만큼 묵직한 것이었다. 특히 개막 전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7의 최후 2인이자 디나 역을 맡은 사이샤 머카도가 주목을 받았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에피를 연기한 모야 안젤라가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재미있는 것은 모야 안젤라가 투어 버전의 ‘라이온 킹’에서 한국의 에피 차지연이 맡았던 주술사 원숭이 라피키를 연기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공연 프로그램에 ‘이 프로덕션은 신춘수에 의해 한국에서 제작된 프로덕션을 기본으로 한다’(This production originally produced in South Korea by Chunsoo Shin)는 문구가 삽입돼 있음에도 뉴욕 현지에서 이 부분은 생각만큼 큰 화제가 되지는 못한 듯하다. 뉴욕 관객의 주된 관심은 역시 초연의 제니퍼 홀리데이와 영화 버전의 제니퍼 허드슨의 뒤를 이어 에피를 연기한 배우 모야 안젤라를 향해 있었다.

또한 아폴로씨어터의 무대는 샤롯데씨어터만큼 깊지 못한 탓인지 LED 패널이 화제가 된 서울 공연과 달리 뉴욕에서는 의상과 가발에 더 큰 시선이 쏠렸다. 무대보다는 할렘이라는 지리적 약점 극복을 위해 아폴로씨어터와 타임스퀘어를 연결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의 독특한 마케팅이 화제가 됐다.


어쨌든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뿌린 뮤지컬 <드림걸즈>의 아폴로씨어터 공연은 11월 22일 본공연을 시작해 12월 6일에 마쳤고, 12일까지 앙코르 공연에 돌입한 상태다. 이후 시카고, 보스턴, 로스엔젤레스, 씨애틀 등 1년여간의 전미 투어에 들어간다.

뉴욕에 머문 기간 겨우 5박6일. 별일이다. 이 기간 중 모은 공연 티켓 총 6장. <드림걸즈> 외에 <빌리 엘리어트> 2회, 주드 로가 타이틀롤을 맡은 연극 <햄릿>, 지난 여름 토니상 음악상을 수상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말>, 1996년 토론토 초연작의 리바이벌 버전으로 지난달 시작한 뮤지컬 <랙타임>을 관람했다. 그래, 미쳤다고 할 수도 있을 만한 스케줄이 맞았던 게다.

하지만 어쩌랴. 뉴욕의 ‘푸디’(Foodieㆍ식도락가)들이 열광한다는 사라 베스(Sara Beth’s)를 찾는 것보다는 주드 로의 무대 연기를 감상하는 게, 센트럴 파크에서 낙엽을 밟는 것보다 임페리얼 씨어터에서 2명의 빌리를 만나는 게 누군가에게는 더 큰 유희가 되는 것을.

아마도 산업부 기자라는 팍팍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단 일주일간이라도 미쳐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 취미가 된) 공연이 바로 거기 뉴욕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짧은 일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공연에 빠져 있는 제작자들이 있어 수많은 마니아의 유희를 담당할 한국 뮤지컬 시장이 미미하나마 조금씩 발전해 갈 수 있다는 것. 그 정도의 깨달음을 얻은 게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라면 수확이랄까.

그래도 이런 생각으로 위안을 삼기엔 지갑의 출혈이 너무 컸다. <드림걸즈>와 3시간여의 정말 환상적인 시간을 보냈지만, 일주일의 휴가 이후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지갑은 얇아져도 너무 얇아졌다.

뉴욕=김소연ㆍ한국일보 산업부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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