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센 언니의 반전 <메디아> 이혜영

작성일2017.03.21 조회수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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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었다. 그리스 비극 중 손에 꼽힐 만큼 불행한 여인 ‘메디아’ 역의 무게에 조금은 억눌려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배우 이혜영은 인터뷰 내내 쾌활했고 가끔은 소리 내어 시원하게 웃었다. 그동안 개성 강한 역할들을 맡아오며 굳어진 ‘센 언니’ 이미지와는 달리 이혜영은 연출가와 동료 배우들의 의견을 먼저 경청하는 소탈한 배우였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자녀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보통 엄마였다. 슈퍼우먼처럼 일터와 가정을 오가는 그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세’ 보였다.

 
"메디아만큼 격렬한 사랑? 20년 전에 해봤어요"

연극 <메디아>의 타이틀롤을 맡아 호평받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우선 관객 분들의 평을 들어보니 저희가 애초에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이 잘 전달된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어떤 관객들은 ‘완전 기 뺏긴 것 같다’거나 ‘한동안 멍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고 하던데 그게 우리가 의도한 바거든. 극장을 나설 때 유쾌한 기분보다는 뭔가 찝찝하게. 메디아의 고통을 함께 느꼈으면 했어요.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메디아는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식마저 살해하는 여인이잖아요. 만만치 않은 캐릭터인데 작품 준비과정은 어떠셨나요?
공연을 앞두고 이렇게 불안하고 준비가 안 된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이었어요. 전 언제나 공연 전에 “나 이만큼 준비했어요. 내 연기 좀 보실래요?”하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알폴디 연출에게 말했더니 너무 당연한 거라고 답하더라고요. 배신감에 치를 떠는 고통스런 여인 메디아가 완벽히 준비 돼서 당당히 나오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감정까지 그냥 다 가지고 연기하라며 저에게 확신을 줬어요.
 
사실 전 만일 메디아처럼 남편에게 배신당한다면 그런 고약한 인간 떠나버리게 내버려 둘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메디아가 가진 극렬한 분노와 복수심을 쉽게 이해하지는 못했는데 알폴디가 이런 조언을 해주더라고요. 큰 분노는 큰 사랑에서 온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제가 큰 사랑을 안 해본 것 같아서 곰곰이 제 인생을 되짚어 봤어요. 20년 전에 저도 메디아처럼 격정적인 사랑을 해봤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지냈던 거죠. (기자 : 20년 전 그 분과는 어떻게 되셨나요?) 그 사람이 지금 남편이에요. (웃음) 큰 딸이 이제 스무살이네요. <메디아>를 준비하면서 저와 남편이 얼마나 열정적이고도 어렵게 사랑했었는지 다시 떠올리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 남편도 새로워 보이고 다시 사랑을 시작한 기분이에요.
 



"비정한 모성보다 신화적 배경을 폭 넓게 봐 줬으면"

그동안 종종 어머니 역을 맡으면서 보여주셨던 모성 연기와는 너무 달라서 어렵지 않으셨나요?

<메디아>를 준비하면서 신화적 배경을 포괄적으로 공부하다보니 모성에 큰 비중을 두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각색 과정에서 신들의 이야기가 삭제되긴 했지만 메디아의 복수와 자녀 살해는 신들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분으로 이해해야 해요. 이게 <메디아>가 가지는 신화적 매력인데 신들은 악한 왕 펠리아스를 벌하기 위해 이아손을 영웅으로 성장시키고 그 과정에서 메디아가 돕게 만들어요. 이아손은 메디아의 도움을 받는 대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신들에게 맹세하는데 그 맹세를 깨버린 거지. 신들이 분노할 만 하죠. 메디아가 자녀를 죽이면서까지 이아손에게 고통을 준 건 신들의 계획일지도 모르는 거예요. 메디아 그녀 자신도 태양신 헬리오스의 혈통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 끔찍한 이야기도 시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칼로 찌르는 장면은 고도의 기술을 요구해서 감정적으로 몰입하기 힘들어요. 피 주머니를 정확히 찔러서 효과적으로 뿜어져 나오게 하는 데에 집중하다보니 엄마로서 자녀를 죽인다는 격한 감정에 매몰되지는 않더라고요. 아역배우들도 전쟁놀이 한다는 생각으로 장면을 소화해서 다행이었고요.
 
아이게우스 역의 남명렬 씨는 "연극이란 사회에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연극 <메디아>를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으로 치환한다면 어떤 질문이 될까요?
맹세의 거룩함이 <메디아>의 메시지죠.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배신의 대가는 처절하다는 거예요. 사랑의 맹세, 굳은 언약. 이런 가치가 사라진 지 오래예요. 노래 가사에서나 찾아 볼 수 있죠. 그런 맹세가 필요한 순간이 얼마나 많고 중요한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게 <메디아>의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메디아가 남편의 손에 죽으면서 그 메시지가 조금 희석되긴 하지만요.
 



"선천적으로 지방이 적어요. 보디빌더 같죠"

타이틀롤 메디아가 가장 주목을 받고 있지만, 다른 배우들도 쟁쟁해요.

<메디아>의 완성은 15명의 코러스죠. 메디아는 혼자 나와 있는 장면이 20초도 안 될 걸요. 대부분 코러스랑 같이 있는 만큼 코러스의 역할이 절대적이죠. 유쾌하고 훈련이 잘 된, 실력있는 배우들이 많아요. 특히 코러스 중 (황)선화는 제가 정말 해보고 싶었던 <미스 줄리>의 줄리 역을 했던 배우인데 단 몇 줄의 대사를 위해 기꺼이 동참해줬어요. 남명렬 선배는 물론 손상규, 박완규 등 명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에요.
 
연습실 분위기는 어땠나요?  
연습 때도 실제 공연처럼 긴장하면서 해서 그런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어요. 알폴디가 리딩 이틀 만에 실제 공연처럼 연습하게 리드하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엄청났거든요. 그래도 연습이나 공연 전에 몸풀기하면서 친해졌어요. 어쩜 그렇게 다들 자기만의 방법으로 몸을 풀던지(웃음). 하루는 저 배우 따라하고 또 하루는 다른 배우 따라하면서 배웠지요. 다들 워낙 프로라서 주로 작품 속에서 만나는 것 같아요.
 
기자간담회 때나 다른 인터뷰를 통해서 보면 알폴디 연출이 혜영씨를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데요. 알폴디 연출과는 잘 맞았나요?
저는 연출의 모든 말을 신뢰해요. 반대 의견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어요. 알폴디가 가장 많이 요구한 부분은 ‘소통’이었어요. 배우들끼리 소통을 중요시한거죠. 그리스 비극이 원래 정면을 보면서 신들을 향해 말하듯이 대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알폴디는 꼭 상대 배우를 보며 얘기하게 했죠.  
 
또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하면서 일부러 모순적인 부분들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모순이 마음에 들었어요. 예를 들어서 “이아손, 아르고 호에 당신과 탔던 모든 그리스인이 알고 있듯이 당신의 목숨을 구한 건 나야. 황금 양 모피를 구할 수 있게 용을 죽인 사람이 누구야. 나잖아”라고 메디아가 외치는데 여기까지는 진짜 고대 그리스 여인처럼 얘기해요. 하지만 그 다음 순간에는 현대적으로 변해요. 이아손이 자신을 냉정하게 밀쳐내자 그의 성기를 탁 쥐면서 쿨하게 “오케이” 한마디를 내뱉어요. 이렇게 고전과 현대적 해석이 만나면서 생기는 모순. 이 모순을 연출의 허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던데 사실은 의도된 거였어요.

무대 의상이 굉장히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하이힐을 신은 데다 드레스 자락이 살짝 길어서 밟혀 넘어질까봐 조마조마한 순간도 더러 있었어요. 의상은 마음에 들었나요?
의상을 만드신 진태옥 선생님은 이미 준비된 사람이었어요. 아마 무대감독을 하셔도 될 거야.(웃음) 이미 너무 많은 경험이 있는 분이고 메디아에 대해 거의 저만큼 고민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저에게 이런 요구를 하셨어요. “일단 내 옷을 입으려면 살찌면 안돼. 내가 이해한 메디아는 이해받고 동정 받아야 마땅한 여자야. 동정 받으려면 배가 나온 것 보단 마른 게 낫지 않겠어? 그래도 기운이 없으면 안되니까 운동해서 살 빼고, 이방인이니까 피부색도 다르게 해” 그래서 운동하고 다이어트하고 태닝도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더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였죠. 사실 체질적으로 지방이 적은 몸이긴 해요. 지금 당장 기름 바르고 힘주면 보디빌더 비슷한 느낌 날 것 같아요. 조명이랑 결합되면 엄청 운동하는 사람처럼 보이던데요(웃음).
 



"가족들은 배우 이혜영을 몰라요"

드라마나 영화로 이름을 알린 효과는 크지만, 여전히 나의 근간은 무대라고 얘기하신 적이 있던데요. 이혜영의 에너지를 담아내기엔 드라마와 영화판은 너무 작은 걸까요?
오래전부터 지인들이 저는 연극과 제일 잘 맞는다는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사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 당시엔 연극을 볼 기회 자체가 없기도 했고요.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 끼를 발산하는 게 꿈이었는데 무대를 경험하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죠.

카메라 앵글에 한정되지 않고 온 몸으로 연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극이 더 좋아요. 예를 들어서 영화 감독이 제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표정연기를 요구하는데 저 혼자 발가락 연기를 보여주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무대 위에서는 핀 조명이 제 얼굴만 비추며 클로즈업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 중이더라도 제가 온 몸으로 연기하는 아우라를 관객들이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전 연극 무대와 잘 맞는 것 같아요. 사람은 자기랑 잘 맞는 데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센 이미지로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오늘 얘기해보니 지금 들고 계신 스마트폰 케이스처럼(노란색 병아리 캐릭터 실리콘 케이스) 애교 넘치는 성격 같은데요?
맞아요. 그런 면이 있어요. 사실 전 드센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 말 있죠? 저는 꿈틀도 안해요. (웃음) 사실 시댁이나 가족들이 배우로서의 저를 잘 몰라요. 제 연극을 본 적도 거의 없으시고요. 어느 날 시어머니가 제 딸 앞에서 “네 엄마는 뭐 하나를 꾸준히 안해서 성공 못하는 거야. 네 아빠처럼 꾸준히 열심히 공부해야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런 말씀에도 한번도 항변해 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억울한 감정이 들지도 않아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은 거죠. 남편도 저의 이런 면에 반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가족들이 배우로서의 저를 잘 모르지만 딸만큼은 그래도 저를 닮았는지 영화, 연극을 좋아해요. 보통 실력이 아니에요. 평론에 아주 재주가 있어요. 그래서 제겐 아주 좋은 친구가 되고 있고요. 아마 할머니가 저에 대해 하는 얘기들도 곧이 듣지는 않을 거예요.
 
작품 때문에 바쁠 때도 새벽에 일어나 중학생 아들의 식사를 챙겨주신다고 들었어요. 공연 끝나고 귀가하면 수면시간도 부족할텐데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그게 집안에서의 역할이잖아요. 집에서는 나를 그런 여자로만 알고 있거든.(웃음) 여기서는 존경하는 선생님, 선배님으로 대접받지만 집에 가면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거죠. 작품이 없을 때는 보통 귀가시간이 오후 4시예요. 아들이 집에 오니까 밤에 외출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낮에 만나고 술도 낮술로 조금 마셔요.
 



▲ "공연 때도 눈 화장은 늘 직접해요. 너무 교묘한 기술이어서 아무도 못 해주거든요."
 



▲ "연극무대는 제 온 몸으로 아우라를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아요."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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