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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한 편의 수묵화같았던 공연이었다. 흰 양복을 입은 시대의 모던 보이 백석, 백석이 사랑했던, 그리고 평생에 걸쳐 그를 기다렸던 자야, 그리고 극의 문을 열고, 극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남자.

한 남자가 백석의 시를 읽고, 까만 겉옷을 입은 한 여자가 등장한다.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오랜시간 백석을 기다려온 노년의 자야다. 백석의 시집이 나온 것을 기뻐하고 있는 자야 앞에 젊은 시절 백석이 나타나 말을 건다. 자야는 지겹다는 듯, 또요, 하고 받아치지만, 곧 백석에게 당신 책이 나왔어요, 하며 그의 시집을 건낸다. 자신의 시집을 읽던 젊은 날의 백석은 노년의 자야에게 그렇게 묻는다.
나와 같이 가겠소? 그 때처럼 다시 묻는 거요. 나와 같이 가겠소?
자야는 머뭇거리지만 이내 황천길이 아닌 고향에 데려가려는 것이라는 백석의 말에 소녀처럼 좋아라하며 분칠 좀 하고 오겠다며 사라진다. 그리고 노년의 자야의 빈 자리에, 싱그럽고 아름답던 젊은 날의 자야가 등장한다.

극은 그렇게 기다림이러는 세월에 눌린 자야의 현실과 그리움이 만들어낸 백석이라는 존재가 문을 두드리는 환상 속을 오간다. 극 초반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야의 목소리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있지만, 현실과 환상을 가로지르는 벽은 너무나도 얇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이구나, 했던 것이 환상이고, 환상이구나, 했던 것이 현실임을 깨닿게 된다.

극 속의 여인 자야는 실존 인물로, 백석의 여인 중 하나였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로 추정되는 여인 중 하나라는 배경지식만 안고 극을 바라봤을 땐, 평생 지아비를 그리워했던 자야라는 이름에 묶여, 연모의 정을 끊어내지 못하고 50년이라는 세월동안 매일 같이 찾아오는 백석의 환상에 시달렸던 한 여인의 처절한 삶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경제적 능력은 없지만,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던 연인 백석의 꿈을 존중해주면서도, 생계를 이어가야한다는 현실의 벽 앞에 다시 기생짓을 하고, 만주로 함께 떠나자는 백석의 제안에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한 여인 자야, 가난한 시인을 사랑했던, 그 여인의 한 많은 삶을.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백석과 자야의 첫 만남을 그리는 중요한 순간에 왜 난을 향한 백석의 애닳는 마음이 먼저 그려졌을까, 라는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후기를 쓰기 전에 시인 백석, 그리고 나타샤에 대해서 조사해봤는데, 백석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백석에게 나타샤는 자야가 아닌 난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극이 중심이 백석이 아닌 자야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시작됐다. 극 속의 현실도 자야의 것이고, 그 환상도 자야의 것이기에, 극은 철저히 자야의 시각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젊은 날의 백석도, 자야와 우직한 사랑에, 난을 잊어가는 백석도.

그 관점의 전환을 기점으로, 나는 극의 초중반에 난의 존재가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자야의 시각에서, 백석과 자야의 애끓는 사랑을 그리고 싶다면, 굳이 난의 존재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극 전개상, 집 안 어른들의 강제 혼인만으로도 그들의 사랑의 방해물은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철저히 자야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이 극에서 난이 등장하는 이유를 나는 자야가 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야 앞에서 백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묵하고 고독한 시인의 모습이 아닌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말 그대로 모던보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부 평론에서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것 같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생각엔 그만큼 자야가 편했기에 그 과묵하고 고독한 틈 사이로, 긴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던 한 줌의 웃음이 흘러나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백석의 마지막 사랑을 바랬던 자야에겐 잔인한 진실일 수 있지만, 그 모든 건 에로스적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같은 안식처를 향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백석을 오랜시간 그리고 바라봤던 자야였던만큼, 자야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극 가득 보여준 백석과 자야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는 현실에서 백석의 애끓는, 그리고 마지막 사랑은 자신이 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백석의 시 앞에서, 백석을 향한 그리움으로 만든 환상 속에서는 백석의 나타샤가 되고 싶었던 자야의 간절함이 만든 또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비교적 고요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극 중간중간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점 빼고는 근래 올라왔던 리딩, 시범공연을 통틀어 내용도, 넘버도, 그리고 무대와 연기도 모두 좋았었다. 특히 자야 역의 정인지 배우가 보여주는 세월의 스펙트럼은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본 시범공연 호평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요소였다.

좋은 가격으로 좋은 공연 관람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공연이였어요 ~

이런 공연이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

시에 음율을 입히고, 시인의 사랑이야기가 어우러지니 굉장히 낭만적이고, 잔잔하고, 감동적이었어요... 영화로 나와도 멋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