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늦은 저녁, 포슬눈이 내리는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을 찾았다. 연극을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었고 연극하는 친구와의 친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살면서 지금까지 본 연극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내가 이 연극에 끌린 이유는 ‘과연 언어가 사람들을 이어줄 힘이 있는가?’를 되묻고 싶어서였다. 나의 삶 속에서 ‘언어’는 사람들을 이어주기보다 상처를 주는 훼방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이어주는 진정한 마음은 ‘언어’에 담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연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젊은 아내는 천장의 등을 갈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서서 까치발을 하고 손을 한껏 위로 뻗는다. 젊은 남편은 그러한 아내를 등지고 관객을 향해 ‘아내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우는 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괴롭다’고 토로한다. 남편은 아내를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무심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부부는 옥신각신하고, 마침내 아내는 떠나겠다고 말하고 남편은 그러한 아내를 이해할 수 없지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부간의 있을 법한 일상적인 대화다. 그런데 이 부부싸움의 꼬투리가 이상하다. 남편은 집안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종이쪽지에 쓰인 글귀의 뜻을 아내에게 추궁하고, 아내는 내가 쓴 글귀가 아니라며 그에 답하는 대신 남편에게 슬픈 일이 있어도 좀처럼 울지 않는 이유를 따진다. 남편은 ‘문자’를 통해 아내에게 가닿고자 하고, 아내는 ‘감각’을 통해 남편에게 가닿고자 한다. 그러나 ‘문자’와 ‘감각’은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으므로 남편과 아내 각각의 ‘언어’는 서로에게 수수께끼로 남겨지고 만다.

남편은 언어학자다. 사라진 언어를 아카이브(기록)로 남기는 일을 한다. 남편의 연구소에는 세상에서 오직 그 둘만 쓰는 언어, 옐로웨이어를 아는 어느 노부부가 와있다. 이 노부부는 옐로웨이어를 녹취하기도 전에 “영어로” 부부싸움을 벌인다. 늙은 아내는 자신의 음식을 맛없어하는 남편이 밉고, 늙은 남편은 잔소리만 해대는 아내가 서운하다.

이 또한 노부부의 있을 법한 일상이다. 그런데 이 부부싸움의 수사가 특이하다. 온갖 비유로 서로를 ‘보지 못하는 자’ 혹은 ‘듣지 못하는 자’에 빗대고, 마침내는 ‘보지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가 되도록 주술을 건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화를 내면서, 영원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도록 저주를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어긋남이 가진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이가 있다. 연구소 직원, 엠마다. 그녀는 혼자다. 부부싸움을 할 상대조차 없다. 그런 그녀가 ‘인공어’인 에스페라토어를 배운다. 에스페란토어 강사는 공부를 어려워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문화(관습)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에스페란토어에는 어떤 문화도 없다. 그러므로 에스페란토어 화자는 그 속에 자신의 삶을 담아내면 된다.’ 즉 어떤 문화(관습)로부터 독자적이며 또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언어인 에스페란토어는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일 수 있다. 삶의 힘으로서의 언어를 실험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엠마는 오래전부터 연구소 상사를 짝사랑해왔다. 에스페란토어 강사는 그러한 마음을 언어에 담아보라고 격려한다. 언어는 그런 것이라며. 엠마는 이에 힘을 얻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을 끌어내어 연구소 상사, 그러니까 아내를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진 조지를 찾아간다. 엠마는 사랑의 환희에 젖어 있다. 반면 조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다. 조지의 곁으로 엠마가 왔다. 절정의 기쁨과 심해의 슬픔이 만나는 순간, 조지와 엠마는 서로의 삶에 서로를 깊게 담아낸다.

조지를 떠난 마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여행길에서 우연찮게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결심한 제빵사를 구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보답으로 그에게서 ‘액종’을 넘겨받는다. 빵의 발효액인 ‘액종’은 (수 세대를 이어 내려왔으므로 앞으로도 이어질) 영원히 살아있는 ‘감각’이다. 그녀는 이렇게 ‘감각’을 되찾은 순간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맛있는 빵을 만드는 제빵사가 되어 사람들과 ‘감각’의 ‘언어’를 주고받는다.

옐로웨이어의 노부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늙은 남편은 병이 들어 곧 죽을 것이다. 늙은 아내는 병상의 늙은 남편과 옐로웨이어로 사랑을 나눈다. 옐로웨이어에는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단어가 없지만, 옐로웨이어는 “영어”보다 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언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옐로웨이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둘뿐이므로 옐로웨이어를 말하는 순간 둘만의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조지는 아내의 빵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한다. 언어가 사라지는 이유는 세 가지라고. 하나는 언어의 화자집단이 사라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권력에 의해 언어가 소멸되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언어를 나누는 사람들의 관계가 끊기는 것이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는 인류 최초의 언어는 ‘시’였을 것이라고 했다. ‘시’가 아니라면 인간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시’는 일종의 주술이다. 주술은 서로에게 가닿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의 언어, 언어의 사랑.

정말 좋았다. 올 한해의 끝에서 너무나 좋은 작품을 만났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선사해준 배우분들, 연출자, 원작자와 번역자, 그 외 무대를 준비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엠마의 마음이 좀 더 분명하게 형상화되었다면 그만큼 이 연극의 구조가 좀 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내게 이 연극의 주인공은 엠마 같았다. 엠마는 이 연극의 모든 인물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자이며, 모든 인물들을 교차시키는 자이다. 그리고 이 연극에서 유일하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젊은 부부와 늙은 부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반면, 엠마는 이들과 무관계한 듯 했지만 언어의 어떤 힘을 구현해냄으로써 자신 스스로의 변화와 함께 이들 모두의 관계를 엮어내고 있다. 특히 조지와 엠마가 절대적인 기쁨과 슬픔으로 서로를 격정적으로 안는 그 장면은 이 연극의 클라이막스인데, 실제로는 너무 어정쩡해서 장외의 목소리가 설명하지 않았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언어학자인 조지가 학자로서 언어에 대한 소신을 가진 인물일진대 학자의 풍모가 전혀 없고 그저 아내를 떠나보낸 소심한 남편에 머물러버렸다. 그로 인해 이 연극의 중요한 한 축인 ‘또 하나의 의미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가 중저음으로 깔리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