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자 간판 무용수,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스타, 호소력 있는 무대 위의 연기자. 발레리나 김주원을 수식하는 단어는 무대 위의 그녀만큼이나 화려하다. 그런 그녀가 오는 16일 막이 오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는 줄리엣으로 무대에 선다. 러시아의 세계적인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안무를 맡아 일찍부터 주목을 받은 무대다. 


연습실은 무대위의 화려함과는 달리 땀내 나는 치열함이 들어 차 있었다. 그 속에서 김주원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머리를 질끈 묶은 수수한 모습. 하지만 환한 피부와 줄리엣을 연기하는 감성 연기, 눈에 띄는 아름다운 체형은 그녀가 이곳을 대표하는 프리마 발레리나라임을 숨길 수 없게 한다.
새침하거나 내성적일 것이라는 발레리나에 대한 이상한 편견을 깨듯, 김주원은 시원 털털한 모습으로 외부인을 반겼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리있고 맛깔나게 한다. 발레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생소하지 않도록 찬찬히 풀어서 말하는 배려도 있다.
발레리나들이 대부분 나이 보다 어려 보이는 이유에 대해 “동화에 나오는 공주 역할을 많이 해서 철이 안 들어서 그런가?”라며 환하게 웃는다. 연습 때 폭발할듯한 감정과 몸짓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내던 그 발레리나가 맞나 싶다.

한국이 만든 정상의 발레리나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가는 격렬한 사랑이 전설적인 안무가 유리그리가로비치에 의해 태어난 [로미오와 줄리엣]. 이 작품의 주역인 그녀는 클래식에 대한 부담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지난 2000년과 2002년에 선보인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무용수의 감성을 좀 더 자유롭게 펴 보일 수 있는 새미 클래식이었다면, 이번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무대는 한 마디로 정통 클래식. 관객이 상상하고 있는 줄리엣을 그대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모르는 분이 없어요. 책이나 영화로도 많이 접해서 정말 모든 분들이 아는 사랑 이야기에요. 연기자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아질 수 밖에 없어요. 공식처럼 정해진 클래식의 틀 안에서 누가 봐도 벗어나지 않는 줄리엣을 만들고, 그 안에서 감동을 줘야 하거든요.”

김주원은 무대 위에서 진짜 줄리엣이 되기 위해 연기 지도를 따로 받고 있다. 말이 없는 무대이기 때문에 손끝과, 눈빛에 더욱 연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하나의 동작이라도 의미 없는 움직임을 싫어하는 그녀에게 연기 수업은 많은 도움을 준다. 이뿐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책과 영화를 종류별로 탐독하고 줄리엣의 이미지에 대해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듣는다. 고집스러움마저 느껴지는 노력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닌가요(웃음). 전 갈라 무대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아요. 화려한 기량을 보여줄 순 있지만 그보다 2시간 동안 스토리를 보여주는 게 좋거든요. 극을 이끌다 보면, 내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동작이 있으면 되게 힘들어요. 그래서 항상 어떤 작품을 하던지 이런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지난 2006년, 김주원은 발레계의 아카데미 시상식이라 할 수 있는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여성무용수 수상했다. 명실상부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해외에서의 러브콜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국립발레단의 무대에 서고 있고, 지방 곳곳의 작은 무대에서도 관객을 찾아갔다. 그러니 해외 진출은 언제 하냐는 질문은 그녀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일 것. 김주원의 대답은 확실했다.
“아마 전 해외로 나가려고 했으면 벌써 나갔을 거에요. 그런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다 나가면 국립발레단에서는 누가 춤춰요. 하하하. 물론 저 없이도 춤을 잘 추는 무용수들 굉장히 많아요. 그렇지만 저라는 무용수는 한국 관객들에 의해 만들어졌어요. 저희는 큰 공연만 하는 건 아니에요. 해남 땅 끝 마을에서도 하고 구청에서 할 때도 있어요. 천막 같은 곳에서도 공연할 때도 있고요. 저는 그런 크고 작은 공연들로 만들어진 무용수에요. 제가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상을 받은 것도 100% 한국 스텝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상을 받은 거고요. 이제는 우리 나라에 좀 더 자부심을 가져도 될 거 같아요. 실제로 외국의 유명한 안무가들은 한국의 무용수들의 기량에 많이 놀라곤 하거든요.”

“발레는 열정, 또 열정 뿐”
입단 11년째. 김주원이 국립발레단에서 보낸 시간이다. 나이로는 발레 단원 중에서 많은 편이 아니지만 기수로는 최고참에 속한다. 선화예술중학교에서 바로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학교에 입학, 프로의 기량을 다진 후 98년 19살의 나이에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이후부터 그녀는 항상 한국을 대표하는 프리마 발레리나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보다 빨리 발레를 시작한 건 아니다. 3~4살에 발레를 시작하곤 하는 우리나라 분위기와는 달리 그녀는 12살에 처음으로 발레를 접했다. 외국에서도 평균 9살에 발레 학교에 입하는 것에 비하면 빠른 편은 아니다.

 

“어렸을 때 여러 장르를 접할 수 있었어요. 태권도도 했고 육상선수로 체전까지 나가려고 했죠(웃음). 체조도 좀 하고, 바이올린, 피아노, 그림, 플릇도 해봤어요. 그런데 너무 지겹더라고요. 발레는 안 지겨웠어요. 그냥 적성에 맞았죠.”
김주원은 누군가와 견주어야 하는 음악이나 체육에는 금방 흥미를 잃곤 했다. 그녀의 발레 경력에 비해 콩쿠르 참여 횟수가 적은 것도 이 때문. 때문에 발레는 그녀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지금도 하나의 작품이 무대에 올라갈 때 마다 항상 다르게 다가와 항상 가슴이 뛴다. “백 명의 발레리나 중 같은 느낌은 하나도 없고, 비교가 부질 없어지는” 발레의 매력이 좋다고 한다.

“발레는 정말 좋아해야 해요. 강요한다고 되지 않아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열정뿐이죠. 한번은 1막이 끝난 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어요. 응급차에 실려 가는 도중 깨서 다시 돌아가 2막을 마쳤었죠.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면, 그게 가능해져요.”

물론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다. “왜 없겠어요. 자주 그랬어요”하며 웃어 보인다. 그럴 때면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곤 한다. “많게는 100명 가까이가 무대에 올라갈 때가 있어요. 제가 아프면, 그 분들이 너무 너무 걱정을 해줘요. 어렸을 때야 나 혼자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주위의 무용수들이 보여요. 관객도 보이고. 그만두고 싶다가도 다시 힘을 받아요.”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프림과 설탕이 들어간 커피를 홀짝 거리며 비워갔다. 또 한번의 이상한 편견이 뇌리를 스친다. 왠지 발레리나들은 소위 말하는 다방 커피는 안 먹을 거 같단 생각. 그 이야기를 듣자 김주원은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정말요? 왜 그런 환상을! (웃음) 무용수들 정말 잘 먹어요. 저도 안 가리고 많이 먹는 편이고요. 안 그럼 힘들어서 못 버터요.”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묻자 “일식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요즘 나이가 드니까 한식도 좋아요. 중식도 좋고, 느끼한 파스타도 좋아하고…가끔 분식도 너무 맛있고. 하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마치 이제 막 신입생으로 입학한 대학 새내기처럼 꾸밈이 없다.
“발레리나들이 새침하거나 우아할거라고 생각하는데 반대라고 보시면 되요. 연습이나 무대에서 다들 항상 긴장 상태거든요. 잘못하면 심한 부상으로 이어지니까. 하루 종일 긴장 상태에 있으니 일정이 끝나면 너무 릴렉스가 돼 버리는 거죠. 예쁜 척이나 우아함을 떨려면 어떤 긴장감이 필요한데 우린 쉬고 싶으니까 그렇게 못해요. 화장도 안 하고 운동화에 모자 달랑 쓰고 다니는 편이에요.”

그녀는 발레를 하면서 몰랐던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 춤을 통해 내 색깔을 찾아간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찾아진다. 오케스트라 피트를 넘어 관객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발레에 빠져 있다. 
“제가 가진 미련함 중 하나가, 나중을 생각 안 한다는 거에요. 전 한 번도 일등이었던 적도 없고, 최고였던 적도 없어요. 아직까지 내 색깔을 찾아가는 중이고, 그래서 발전을 하고 있는 거죠. 제가 나중을 생각하는 시기에는 아마 춤을 그만 두지 않을까요?”
김주원은 현재를 사는 발레리나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 충실하고 즐길 줄 안다. 무대에서 맛보는 보람과 희열은 중독과 같아서 그녀는 오늘도 새로운 토슈즈로 갈아 신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글 : 송지혜 기자(인터파크ENT song@interpark.com)
사진 : 다큐멘터리 허브(club.cyworld.com/docuher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