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무대 위에 서고 관객은 객석에 앉아 진행되는 연극은 참 오랜 관행이다. 그리스에서는 2천 년도 더 전에 시작했고, 영국에서만도 중세부터 그러했다. 그런 낡은 공간의 구분을 깨고, 전통적인 포맷을 벗어나 연극이 좀 더 새로울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 끝에 생겨난 요즘 연극형식 중 하나가 프로미네이드(promenade) 공연이다. 우리말로 하면 ‘산책연극’쯤 될까. 객석에 가만히 앉아 보는 연극이 아니라 맘대로 걸어 다니며 여기 저기 들여다 보는 연극을 말한다.

최근 몇 년간 이런 ‘산책연극’으로 각광을 받아온 영국의 극단 펀치드렁크 (punchdrunk)가 에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집을 제목으로 단 [붉은 죽음의 가면(The Mask of the Red Death]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포우의 괴기스러운 미학이 담긴 시세계를 연극화한 이번 공연은 작년 말 시작하여 2월까지로 예정되었지만 완전매진을 기록하면서 2007년 영국연극계 최고의 이벤트로 칭찬을 받았고 올 4월까지 연장공연으로 이어졌다. 관객은 연극판이 벌려져 있는 거대한 공간으로 초대된다. 그 공간은 극장 안의 객석이 아니라 미지의 공간이다. 5년 전 [맥베스]를 각색한 [세이 노 모어 (Say No More)]는 방학기간 중 변두리 학교 건물을 빌려서 했고, 재작년 [파우스트]는 버려진 창고건물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올해는 그들이 처음 걸어 다니며 보는 [햄릿]을 공연했었던 극장, 배터씨아트센터(Battersea Art Centre, 약칭BAC)로 돌아왔다.

입구에서 백스테이지까지 모두 열린 무대
[붉은 죽음의 가면]이 공연중인 배터씨아트센터는 보통 때와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천정 꼭대기까지 모든 내부가 극적 공간으로 장식되어 있다. 분장실을 비롯해, 백스테이지의 많은 방들이 설치미술로 가득하다. 천정에 까지 커튼 같은 천이 드리워져 있고, 구석 구석에 촛불과 작은 장신구들이 가득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로 이동하여 포우가 사는 동네를 방문한 듯하다. 입장할 때도 원래 출입구가 아니라 뒤편 한 구석에 조그만 문으로 입장한다(아마 출연자 입구일 것이다). 들어서면 범상한 듯 보이나 범상치 않을 것만 같은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에게 하얀 마스크를 나누어준다.

 

괴기 영화 [스크림]에 나왔던 것과 흡사한 마스크를 쓰고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간단히 안전에 관한 주의 사항을 일러준다. 그리고 재단사를 꼭 찾아가보라고, 그에게 꼭 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는 층마다 두 세 명씩 내려준다. 일행이 누구 누구냐고 물어보고는 일행이 미처 다 내리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리는 짖굿음이 발동된다. 혼자 봐야 더 재미있다는 지론이다. 공연 끝나고 만나서 서로 본 것을 비교하는 재미를 강조하면서.

이쯤에서 언뜻, ‘귀신의 집’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공원 한 구석에 비명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곳. 사실 구성 면에서 유사한 점이 꽤 있다. 다른 점이라면 관객이 귀신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유령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 그곳을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배우들이 그런 관객을 보고 놀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관객들의 존재는 대부분 무시된다. 광기서린 눈빛의 몇몇 배우들이 와서 귓속말로 뭐라고 속닥거리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처음 안내원이 시킨 대로 재단사를 찾아가면 말없는 키 큰 남자재단사가 관객들에게 검은 모자와 검붉은 색의 망토를 입혀준다. 이렇게 차려 입고 보면 관객들은 다 똑같아 보인다. 흰색 마스크에 망토 차림의 유령들. 이 상태로는 같이 갔던 친구를 도중에 잃어버려도 공연 중에 다시 찾을 방법이 거의 없다. 끝나고 밖에서 재회하는 수 밖에. 

주인공, 조연, 앙상블... 찾아보는 건 관객의 선택
또 귀신의 집과 다른 점이라면 정해진 루트가 없고 마음대로 내키는 방향으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귀신처럼. 왜냐하면 건물의 거의 모든 곳, 주인공과 엑스트라를 포함하여 모든 극중 인물들이 시종일관 존재하며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관객들은 극중인물들이 살고 있는 공간, 그들이 극중 삶이 벌어지는 작은 마을을 방문하는 것이다. 음산한 카페에서는 종업원이 계속해서 테이블을 닦고 있고, 술집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집시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있다. 복도 끝 구석방에서는 남자들 한 무리가 카드를 치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렇게 마을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까 왔었던 곳에 다시 오게 되기도 하고, 아까는 텅 빈 침실이었는데, 갑자기 웬 남녀가 격렬하게 싸우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른 관객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면, 무슨 일인가 하면서 덩달아 따라가 본다. 그렇게 ‘주인공’인 듯 싶은 우울한 시인 같은 모습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를 따라 가면 극장 메인 로비 계단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격투와 등골이 오싹해지는 죽음의 기도문 낭송을 목격할 수 있다. 더불어 수많은 극중 인물들의 관계가 짐작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곤 깨닫는다. 내가 엉뚱한 배우들을 쫓아다녔구나.
주인공이 저 사람이었구나. 다행히 이런 깨달음은 뒤늦지 않다. 공연은 한 시간 반 간격으로 되풀이 된다. 그러므로 처음 한 시간 가량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탐험과 모험정신을 발휘하고, 두 번째로 반복될 때 제대로 된 극의 흐름을 따라 다니면서 작품을 이해하면 된다. 필자 역시 몇 년 전 [맥베스]를 각색한 [세이 노 모어(Say No More)]를 보러 갔을 때는 헤매며 돌아다니다 모든 주요장면을 다 놓쳤고, 이미 왕을 살해한 맥베스가 피묻은 손을 씻는 것을 본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두 번째에는 맥베스역의 배우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놓친 명장면들을 거의 다 만회했지만.

관객 자신만의 버전으로 기억하는 산책연극 속속 선보여 
이러한 산책연극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은 모든 관객들의 자신만의 기억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마치 인생이 그러하듯,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을 가지고 공연을 나름대로 해석한다. 세 시간여 진행되는 공연은 한 편이지만 백 명이면 백 명의 관객이 모두 자기만의 버전으로 공연을 기억한다.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철저히 포스트모던한 사고이다. 절대진리는 없다. 각자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상대적 진리가 존재할 뿐이다. 펀치드렁크 극단의 공연의 또 다른 매력은 온 몸을 던져 연기하는 배우들의 신체술이다. 유럽 최고의 무용학교인 라반센터 출신의 무용수들로 구성된 출연진은 숨이 멎을 듯한 탱고에서부터 벽을 올라타고 난간을 뛰어넘는 도주장면, 격렬한 결투장면을 숨가쁘게 연출한다. 그리고 구석구석 세심하게 장식된 무대미술은 교회 지하의 납골당에서부터 은밀한 침실, 흥청거리는 술집까지를 훌륭하게 재현한다.

 

이렇게 전통적 극장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연극공간을 창조하는 연극들을 요즘은 공간맞춤연극(site specific performance)이라고 부르며, 산책연극(promenade performance)이 이러한 공간맞춤연극의 대표적인 예이다. 즉, 다른 도시로 투어를 가서 공간이 바뀌면 공연은 다른 버전으로 업데이트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재현’은 없다. ‘재창조’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지 이런 류의 공연을 선도하는 극단들은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이번 <붉은 죽음의 가면>을 공연한 극단도 펀치를 마시고 취했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펀치드렁크(http://www.punchdrunk.org.uk)이고, 재작년 에딘버러 기록청 건물에서 [오르페우스]를 선보인 극단이름은 꿈꾸고 생각하고 말하라는 뜻의 드림씽크스피크이다.

이제 가만히 앉아 보여주는 대로 연극을 보는 주입식 연극의 시대를 끝내고, 관객들이 스스로 발품을 팔이 찾아 다니며 자신만의 버전을 창조하는 창의적인 연극의 시대가 왔다. 설치미술과 무용과 연극이 절묘하게 혼합된 그들의 새로운 연극이 궁금하면 런던행 비행기표를 지금 끊으시라. 4월 12일까지 펀치드렁크의 공연이 런던 배터씨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단, 혹여 매진되지 않았는지 먼저 확인하기 바란다.

<사진설명>
1. [붉은 죽음의 가면]_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배우들, 헥터 하크니스, 아담 버튼(Hector Harkness, Adam Burton)
2. [붉은 죽음의 가면]_아담 버튼, 잭 래스키, 리버 카몰트 (Adam Burton, Jack Laskey, River Carmalt)
3. [붉은 죽음의 가면]_죽음의 기운이 서린 방에서 모골이 송연한 표정을 짓는 배우.
4. [파우스트]_펀치드렁크의 최근 작 [파우스트]에서 몸으로 연기하는 배우들, 벤 듀크와 게어 하이튼 (BenDuke, GeirHyt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