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사이공은
세계 4대 뮤지컬이다 !?

난 아직도 89년 이 뮤지컬을 처음 보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감동이라는 단어만으로 그때의 심정을 형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게 ‘미스 사이공’은 차라리 충격이었다. 부끄러울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어린 마음에 그것은 차라리 운명과 같은 만남이었다고 되뇌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 해부터 몇 년간 배낭여행 중 런던 방문길에는 항상 ‘미스 사이공’을 만났다. 로열 드루리 레인 극장 앞에 서 있으면 재미난 풍경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포스터나 기념사진 등 온통 ‘미스 사이공’으로만 치장한 레스토랑이나 카페는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공연 시작 몇 시간 전이면 극장 옆쪽 출연자 출입구 주변에 많은 동남아 배우들을 만날 수 있던 것도 이색적인 광경이었다(생각해보라. 그곳은 코벤트 가든 옆, 런던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다. 그런 곳에 동양인이 이렇게 많이 모여드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간혹 열성 팬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다 배우들을 알아보고 사인이라도 청할라치면 만면에 미소를 띤 그들이 반가이 맞아주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킴을 제외한 대부분 여자 배우들은 가창력도 뛰어났지만 스타일이 뛰어난 멋쟁이들이었는데, 덕분에 이곳에 있다 보면 아직 무대의상이 아닌 현대적인 복장을 한 가무잡잡한 피부에 늘씬하고 매력적인 동양 여배우를 여럿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별난 볼거리였다.

공연이 끝나면 주로 중장년층의 관객들이 무리지어 극장에서 쏟아져 나오곤 했는데, 너무 눈물을 많이 흘린 탓인지 빨간 토끼눈을 하고선 서로에게 무언의 미소를 건네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원래는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함께 공연을 보고 나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서로에게 미소를 건네며 목 인사를 나누고 총총 길거리로 사라지는 풍경은 정말 재미있는 모습들이었다.

초연부터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미스 사이공’은 이렇게 그만의 독특한 풍경을 창출해내며 10여년 세월 동안 드루리 레인 극장을 지켰다. 초연 이듬해인가 시작된 브로드웨이 버전도 비슷한 광경을 만들어내긴 마찬가지였다. 91년 AFKN에서 우연히 봤던 새해 퍼레이드 풍경이 담긴 TV 프로그램에서 맨하튼 길바닥에 얇은 담요 한 장을 펴고 어린 탐을 부둥켜 안은 채 ‘I'd give my life for you(내 생명이라도 바칠거야)’를 부르던 리아 살롱가의 슬픈 눈망울은 ‘미스 사이공’의 브로드웨이입성을 화려하게 대변해주는 상징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미스 사이공’은 80년대 런던에서 시작돼 브로드웨이를 점령하며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대표적인 네 작품의 하나이다. 영미권에서는 이들 뮤지컬을 일컬어 Big 4라 부르기도 하는데, 하나씩 손꼽아 보자면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그리고 ‘미스 사이공’이다. 네 작품 공히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장기 상연되며 전무후무한 흥행기록을 세웠는데, 이들이 모두 웨스트엔드에서 처음 막을 올렸다는 이유 때문에 한때 브로드웨이에서는 Big 4를 뮤지컬계의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라 부르기도 했다.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말은 바로 이 Big 4를 한국식으로 적용한 표현이다. 작품의 완성도를 단지 장기 공연이나 흥행으로만 측정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반면 이들 Big 4가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였던 현대 뮤지컬의 시장을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시켰다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것 같다.

Big 4 중에서 아직 한국어 공연이 올려지지 않은 작품은 ‘미스 사이공’이 유일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이번 한국어 버전은 기대도 크고 의미도 깊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을 ‘토끼눈’으로 만들 수 있을까. Big 4도 좋고 4대 뮤지컬도 좋지만 오랜 세월 ‘미스 사이공’을 흠모해왔던 필자가 제일 궁금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사실 최근 많은 영미권 라이선스 뮤지컬들이 우리 무대에 올려졌지만, 솔직히 머리로만 이해될 뿐 가슴에 감동을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른 것들은 다 차치하더라도 엇비슷한 전쟁을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 베트남전의 슬픈 실화를 무대화한 ‘미스 사이공’은 쉽게 공명될 수 있는 이야기 소재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직 서울 한 복판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는 이데올로기의 다름으로 인한 분단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는 이 땅이기에 아픔은 더욱 여실할 수밖에 없다.

요즘 성남아트센터에서는 연습이 한창이다. 덕분에 아직 궁금증은 개막일까지 미뤄두어야 할 것 같다. 기왕이면 이번 한국 초연무대가 또 다른 ‘미스 사이공’의 신화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씩 달력을 지워본다.

미스 사이공은 실화다 !?

모든 일에는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뉴튼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은 떨어지는 사과를 관찰한 덕분이었고, 아르키메데스가 금관의 순도를 알아낸 것은 넘치는 목욕물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어찌 과학사의 대 발견들뿐일까. 예술작품의 탄생 이면에 작은 깨달음이 동기가 된 경우도 많다. ‘미스 사이공’도 바로 이런 경우다.

‘미스 사이공’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근대 개항기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일본 기생이었던 나비 부인과 해군사관 핀커튼은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둘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제결혼을 하지만 나비 부인과 아이를 두고 미국으로 돌아갔던 핀커튼은 소식이 없다. 이윽고 3년 만에 아내를 데리고 나타난 그는 아이만을 데려가겠다고 말한다. 외면당한 사랑과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그녀는 결국 자결을 택한다.

서양에서 ‘나비 부인’은 아시아 특히 일본의 독특한 이미지와 정서를 극화한 대표 작품으로 통한다. 그들에게 ‘동양’ 하면 바로 ‘나비 부인’이라는 연상적 전이가 이뤄질 정도로 동방 세계에 대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 일종의 문화 아이콘인 셈이다.

하지만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오페라 ‘나비 부인’의 단순한 아류작은 아니다. 오히려 ‘미스 사이공’은 ‘나비 부인’의 뼈대에 월남전이라는 현대사를 적절히 활용해 살을 덧붙임으로써 전혀 새로운 생명력을 부가해낸 작품이라는데 그 진정한 예술성이 담겨 있다. Big 4의 다른 세 작품이 주로 판타지나 아득한 추억의 예스런 맛을 추구한 반면, ‘미스 사이공’은 가슴시릴 정도로 처절한 전쟁의 아픔과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소재의 현실성에서 여타 작품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만의 특성을 지니게 된 셈이다.

그래서 작품 제작의 모티브도 흥미롭다. 의외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바로 1985년 한 잡지에 실린 사진이었다. 그곳엔 공항에서 생이별하는 월남 여인과 혼혈 소녀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사연은 기구했다. 월남전 당시 한 베트남 여인이 미군 파일럿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 헤어져 서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갖은 노력 끝에 여인은 마침내 옛 연인에게 연락을 취한다. 그녀가 끝내 포기하지 않고 사랑했던 미군을 찾았던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미군 병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때문이다. 혼혈의 아픔을 안고 사는 딸과 함께 여인은 베트남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쉽지 않았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미군 병사는 이미 다른 미국 여인과 결혼한 몸이었고, 결국 아이의 비자밖에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제 헤어지면 죽는 날까지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여인은 사랑스런 딸을 풍요로운 세상, 미국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사이공이 함락되기 수주일전 아이가 떠나는 날, 그래서 공항은 생이별의 울음바다가 됐다.

‘레 미제라블’의 영국시장 진입을 성공시킨 뒤 후속 작품을 모색하던 작곡가 끌로드 미쉘 쉔베르와 작사가 알랑 부브릴은 이 사진을 보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나비 부인’을 월남전에 맞춰 각색하자는 작품 제작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게 된다.

이런 사연 덕분에 그 빛 바랜 잡지 속 흑백 사진은 ‘미스 사이공’을 좋아하는 애호가들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됐다. ‘미스 사이공’의 한국 공연 홈피에도 제작 배경에 대한 설명이 담긴 페이지에 ‘이것이 알랑과 나에 있어 모든 시작이었다’는 쉔베르의 코멘트와 함께 바로 그 문제의 흑백 사진을 만날 수 있다. ‘미스 사이공’ 공연 티켓을 예매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반드시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고 말하고 싶은, 전쟁에 관한 ‘아픈’ 현대사의 산 증거이다.

P.S. 첫 번째 칼럼을 읽고 ‘미스 사이공’이 마지막 남은 Big 4라는 내용에 대해 몇 몇분이 문의 전화를 주셨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한국어 공연도 없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은 한국어로 공연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동시에 두 개의 공연이 롯데예술극장과 리틀엔젤스회관에서 함께 막을 올렸지요. 남경읍과 남경주 형제가 각기 다른 버전의 공연에서 자베르 경감과 마리우스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중 한 버전은 음반으로 제작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공연이 정식 라이선스 버전이 아니었다는 점이지요.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저작권 보호 제도인 베른 협약에 가입되지 않았었고, 그래서 원작자와 상의되지 않은 번안극들이 거리낌 없이 무대에 오르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 되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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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원종원 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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