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꽃이고 비밀이었을까, 연극 <꽃의 비밀>

에디터 조주영

언제 부터인가 공연장에 방문하면 공연 시작 전이든 후든 꼭 관객석을 둘러보곤 한다. 처음에는 그저 어떤 연령대의 관객들이 많이 오는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점차 어떤 관객들이 모였느냐에 따라 연극의 성격을 미리 조금은 알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마치 예고편 같았달까. 그런 점에서 연극 <꽃의 비밀>의 예고편은 달랐다. 관객층은 한마디로 폭넓었다. 풋풋한 연인부터, 팔장을 끼고 오붓하게 극장을 찾은 모녀, 그리고 중년의 부부까지. 익숙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특정 세대와 성별에 국한되지 않은 관객층을 목격하는 것이 연극에 대한 궁금증과 동시에 기대감을 높이기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고백하건대 그것은 꽤나 설레는 일이었다.

마침 앞에 앉은 모녀의 대화가 들렸다. “장진 감독이 만들었어, 엄마.” 그렇다. 두 모녀는 ‘장진 감독’의 작품을 보러 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진식 코미디’를 경험하러 온 것이다. 그럼 이제는 고유명사가 된 ‘장진식 코미디’는 어떤 매력을 지닌 것일까. 이미 코미디 같은 세상을 살아감에도 사람들은 왜 장진식 코미디를 찾는 것일까. 그 매력은 바로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웰메이드 코미디라는 점에서 나온다. 특히 2002년 연극 <웰컴 투 동막골> 이후 13년 만에 돌아온 장진의 코미디 연극 <꽃의 비밀>은 스토리의 탄탄한 구성, 연출, 그리고 연기가 돋보인다. 그래서 2015년 연말 초연되어 2016년 전국 투어, 그리고 2016년 연말부터 시작된 앵콜 공연까지 관객들의 성원에 입어 지속되는 것이 그리 놀랍지 않은 까닭이다.

스토리는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네 여인은 여느 날과 같이 평화로운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그 중 한 명이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남편의 자동차 브레이크를 고장내킨다. 그렇게 네 명의 남편이 죽지만 부인들은 충격과 슬픔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곧바로 다음 날 방문 예정인 건강 검진을 위해 바삐 준비한다. 통과해야만 20만 유로라는 보험금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 여인이 남장을 하는 과정에서 그려지는 해프닝을 다룬다. 불륜과 남장. 사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소재임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은 것만 같은 이 이야기를 180° 바꾸어 놓는 것이 있다. 바로 ‘캐릭터’이다. 네 여인은 다음과 같다. 부부끼리 전화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푼수 왕언니 ‘소피아’, 남편이 자고 있을 때만 “이혼하자”라고 말하는 소심하지만 알고 보면 털털한 주당 ‘자스민’, 21살 배달부와 썸을 즐기는 예술학교 연기전공 출신 미모 담당 ‘모니카’, 그리고 무엇이든 고치는 공대 수석 졸업생 여자 맥가이버 ‘지나’까지. 아, 이 여자들 정말 심상치 않다.

모두 개성이 뚜렷한 역을 맡은 네 명의 배우들은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섬세히 표현한다. 예컨대 왕언니 역할을 하는 소피아는 결혼생활을 오래 한 부부의 소원해 진 모습을 “전화”라는 소재를 통해 관객들의 공감을 사고 동시에 관객들을 폭소케 한다. 한편, 자스민은 눈치 없이 진지한 상황에서도 혼자 다르게 대답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엉뚱하며 귀여운 매력을 선보인다. 배우들은 남장으로 인해 극이 가장 흥미진진해지는 2막에서도 맛깔스러운 연기를 이어나간다. 소피아 역의 이선주 배우는 남성역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로 어색함이 전혀 없는 연기로 극의 내용을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그중 가장 매력 있는 배우를 뽑으라면 단연코 자스민을 꼽을 것이다. 필요한 때 한방을 날리는 배우 조연진의 유머와 센스는 관객들을 좌석 뒤로 넘어가게 하기에 충분하다. 모니카 역을 맡은 소유진 배우는 직장 삽입이라는 쉽지 않은 연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극을 클라이맥스로 끌고 가는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 한편, 지나라는 인물은 상대적으로 발랄하며 동적인 세 역할과는 달리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보이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왕언니 소피아부터 불안에 떠는 지나까지 캐릭터들은 서로를 보완해준다. 결국 캐릭터로서 극의 긴장과 이완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장진 연출의 탁월한 극작 능력을 극 전체에 걸쳐 확인할 수 있다.

초반부에는 이탈리아라는 배경도 그렇고, 과장된 듯한 캐릭터의 대사와 몸짓, 그리고 남편들은 죽었다는 설정과 보험금을 타기 위한 고군분투까지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아무래도 현실에서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며 서서히 그 간격은 좁혀지고, 어느 순간 웃음 뒤에 가려진 네 여인의 사연을 듣다 보면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당하게 보이는 왕언니이지만 사실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는 소피아, 남편에게 이혼을 줄곧 속삭이지만 남장 소동 후 눈물과 함께 남편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자스민이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네 여인은 의사 카를로와 간호사 산드라의 의심을 사는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보험금을 타는 데는 성공을 한다. 그렇게 전쟁 같던 하루는 마무리 된다. 이는 마치 부인들이 주체가 되어 환락가로 향하는, 또는 바람이 난 남편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깔끔한 승리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에 비해 결말은 너무나 허무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새벽은 밝았지만 결국 부인들이 한 것은 남편들이 할 것을 대신, 조금 더 일찍, 훨씬 고단한 방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말에 아쉬워하는 관객은 여성이 너무 수동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닐 수 있다. 필자도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필자는 결말이 지니고 있는 이면의 메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이 연극이 블랙코미디라고도 불리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웃고 즐기던 시간들은 결말에서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남자들을 일컫는 간호사의 고백과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같은 여성이지만 남성의 목소리를 빌릴 수밖에 없었던 네 부인들의 모습, 그리고 남편의 이중생활을 알게 된 채 같은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부인들의 미래까지. 풍자와 해학 속에서 아직까지 여성에게 기대되어지는 것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다른 층위의 의미를 지닌다. 즉, 자극적이고 몸 위주인 코미디가 아닌 사회의 모순과 이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축소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는 처음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이나 끝을 향할수록 그 어느 사회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여성들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극을 끝난 후 왜인지 모르게 슬펐다는 한 관객의 말에 공감이 간다. 이 연극은 우스꽝스럽기에 슬프다. 그래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의 가정은 어떨까. 우리의 사회는 어떨까. 우리는 누구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것일까. 그들은 누구의 꽃이었을까. 꽃이 꽃으로 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을까. 그들이 품은 비밀은 과연 비밀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만큼이나 극장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http://artmconcert.com/220923374413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