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웨스트엔드 상반기 가장 관심을 모았던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의 막이 드디어 올랐다. 프리뷰 기간 마지막 주에 찾아간 뉴 런던 극장(New London Theatre)은 이 뮤지컬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을 아는 듯 약간의 긴장감과 충만감이 흘렀다. 1100여석의 오픈 스테이지 형태의 극장에 들어서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떤 모습의 무대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오리지널 런던 <캣츠>가 이곳에서 공연할 당시 코벤트 가든 대형 스크린으로 보여준 고양이들의 마지막 날 공연 모습도 볼 기회가 없었던 터라 웨스트엔드 뮤지컬 역사에 또 하나의 의미로 남을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모은 트레버 넌의 새로운 시도 
트레버 넌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뮤지컬로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웨스트엔드를 포함한 전세계의 뮤지컬 팬들이 커다란 기대감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 젊은 나이에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 : Royal Shakespeare Company)의 예술 감독으로 명성을 쌓았고,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의 예술 감독을 지냈으며, 웨스트엔드 뮤지컬의 위상을 한단계 높인 현재 진행형의 인물이 마가렛 미첼의 세계적인 명작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뮤지컬화 한다고 발표했으니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가 연출한 뮤지컬만 보더라도 <캣츠(Cats)>의 대성공을 시작으로 <레미제라블>,<스타라잇 익스프레스>,<선셋 블러바드> 그리고 작년의 <포기 앤 베스(Porgy and Bess)>까지, 그의 손을 거치는 작품들은 항상 신선했고 새로웠으며 역동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을 알기에 관객들은 그가 연출한 뮤지컬은 뭔가 다를 거라고, 뭔가 새로운 것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기에다가 <캣츠>의 21년 웨스트엔드 공연의 현장 뉴 런던 극장(New London Theatre)에, 그것도 온갖 잡동사니들을 젤리클 고양이들의 놀이터로 변신하도록 도와준 셋 디자이너 존 내피어(John Napier)까지 팀에 합류한 이상 공연의 대성공은 시간 문제인 듯 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기대가 있었기에 평론가와 관객들에게 있어서 이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지극히 연극 같은 뮤지컬의 모습은 현란한 무대 장치에서 나오는 스펙타클한 광경이나 다양한 최신 조명기들이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관객이나 평론가들에게는 실망감으로 다가갔을 수도 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원작에 대한 중압감
공연의 가장 큰 약점은 아무래도 중간 휴식 포함 3시간 30분이 넘는 러닝 타임. 보통의 뮤지컬 공연이 2시간 30분 정도임을 감안할 때 3시간이 훌쩍 넘어버리는 공연 시간은 배우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부담감으 로 작용할 거다. 원작의 소설이 거의 1000 페이지가 넘는 소설이고, 1939년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의 동명 영화도 러닝 타임 4시간 정도임을 감안할 때 내용을 줄이고 줄여서 인터벌 제외하고 3시간 10분에 내용 전개를 했다는 것은 어쩌면 칭찬 받을 만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무대 테크놀러지의 결정체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3시간 공연도 길게 느껴지는 현실에서 이번 공연의 공연시간이 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약점이다.

이런 공연시간에 대한 부담감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만들어내었다. 공연 내내 각각의 장면들이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고, 이러한 급한 스토리 전개는 배우들에게도 지켜보아야 하는 관객들에게도 공연 전체의 리듬감을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잃게 한 원인이 되어 버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레이션(narration)의 사용이다. 때로는 무대 위에서의 내레이션이 관객들의 상상력과 맞물려 보는 것 이상의 장면을 연출해 낼 때도 있지만 배우들의 잦은 내레이션이 상대적으로 관객들이 조금 더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 느낌이다.

스칼렛과 레트의 부활, 화려함 대신 배우에 집중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아직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원작의감동과, 이를 그대로 살려내려는 무대 때문일 거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생존 조건에서 살아 남으려는 강인한 스칼렛의 모습은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특히 공연이 2막의 후반부로 갈수록, 레트 버틀러(Rhett Butler)와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의 갈등이 표면화될수록 관객들은 극에 몰입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의 갈등이 이중창으로 표현됐을 때 대부분의 관객들이 공감하며 감상에 젖을 수 있었다.

극의 마지막에 레트 버틀러가 그 유명한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솔직히 그대여, 이제 내 알 바 아니오)’ 이라는 명대사를 외치며 퇴장할 때 대부분의 관객들이 박수로 화답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30명이 넘는 배우들이 3시간 반의 공연을 집중하며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마땅히 칭찬 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다른 볼거리가 최소화된 상태에서 관객들은 배우들에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유명한 싱어 송라이터이자 배우인 레트 버틀러역의 다리우스 데니시(Darius Danesh)는 큰 키와 매력있는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당당함과 약간의 반항적인 모습이 젊은 클라크 게이블의 모습을 연상케 했으며, 스칼렛 오하라 역의 질 페이스(Jill Paice) 또한 비비안 리의 도도함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현실의 굴레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는 강인하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약한 스칼렛의 모습을 선보여 주었다.

가장 관심있게 지켜 볼 부분 중의 하나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이다. 오하라 집안의 종으로 대표되는 매미(Mammy)와 프리씨(Prissy)의 역할이 종전의 책이나 영화에서의 묘사보다 더욱 인간적이었던 사실은, 보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흑인 특유의 소울 느낌의 노래들과 어울려 설득력을 갖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존 내피어의 셋 디자인은 닐 오스틴(Neil Austin)의 조명 디자인과 어울려 오픈 스테이지 형태의 뉴 런던 극장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가장 자연스러운 무대를 연출해 내었다. 현란한 무대 조명과 함께 테크놀러지와 결합한 셋 디자인을 예상한 관객들에게는 실망감으로 다가올 수 있겠으나, 배경으로 쓰여진 사이클로라마와 복층 구조의 저택 앞마당을 통나무의 부드러우면서도 조금은 황량한 느낌의 무대로 선보여진 디자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공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오픈 스테이지의 장점을 살려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에서 연기하고 관객들 뒤로 입장/퇴장하는 모습들은 마치 내가 극에 속해 있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웨스트엔드의 가치는 실험성
현재 공연이 흥행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이 작품은 여러 가지의 이유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뮤지컬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의 범주가 아니라 공연예술로서의 위상을 더욱 다지기 위해서는 이번 작품과 같은 새로운 소재에 대한 시도와 시도에 따르는 성공이 자주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웨스트엔드 뮤지컬 제작자들은 새로운 작품이나 시장을 개척하는데 그리 많은 노력을 쏟고 있지는 않는다. 현재의 뮤지컬 제작이라는 것이 성공 가능성을 쉽사리 점치기 어려운 위험성이 큰 산업으로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80년대 이후 지금껏 장기 공연하고 있는 작품들이 꾸준히 돈을 벌어주고 있기에 제작자들에 있어서 새로운 작품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러한 추세는 이미 관객들에게 검증된 리바이벌 작품의 제작에만 열을 올리고있는 지금의 현실로도 나타나고 있다.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생명력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전적으로 관객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있는 시도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흥행성으로 나타날 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덧붙여 이런 시도를 바탕으로 조금 더 다양한 형태의 뮤지컬 작품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