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극장에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감동과 슬픔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오페라 <나비부인>의 스토리와 베트남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전쟁에 참여했던 우리의 아버지들이 아직 그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전쟁이라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경험한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여지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사실 이성적으로 바라볼 때 <미스 사이공>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굳이 사이드(Said)의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논리로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수동적이고 미천한 동양의 여성과 아무런 죄책감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는 착하디 착한 미국인 크리스의 인물 설정이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실제로 공연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당시 많은 아시안계 미국인들이 공연에 반대했고 상처 받았던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하지만 이 모든 불합리함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미스사이공>은 킴의 자식에 대한 무한한 헌신과 사랑, 킴-크리스-엘렌의 삼각 관계, 엔지니어로 대변되는 혼혈인들이 겪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과 어메리칸 드림 등 이 아직까지 우리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도 없다.

부브릴-숀버그 콤비의 또 하나의 러브 스토리
<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의 성공 이후 부브릴-숀버그(Alain Boublil & Claude-Michel Schonberg) 콤비가 새롭게 도전하는 뮤지컬 <마거릿(Marguerite)>은 세계 2차 대전의 독일 나찌에 점령당한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인물들의 러브 스토리이다. 이번 공연에서 부브릴-숀버그는 연출가인 조나단 켄트(Jonathan Kent)와 함께 대본을 썼고, <레미제라블>에서와 마찬가지로 허버트 크레츠머(Herbert Kretzmer)가 가사를, 그리고 오스카상의 프랑스 작곡가 미셀 르그랑(Michel Legrand)이 음악을 맡았다.

 
허버트 크레츠머,알랭 부브릴, 미셀 르그랑,클로드 미셀 숀버그

시어터 로열 헤이마켓(Theatre Royal Haymarket)에서 본 공연에 들어간 이 작품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fils) 의 소설 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여자 주인공 마거릿에 집착하는 나찌의 고위 관료 오토(Otto)와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가 제공하는 부와 권력에 그의 정부가 된 마거릿, 그리고 연상의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버리는 젊은 피아니스트 아망(Armand)의 삼각관계가 전쟁의 긴박함 속에서 얽혀지는 모습을 담은 이번 뮤지컬은 여러 부분에 있어서 이전의 성공작 <레미제라블>,<미스 사이공>과는 다른 면이 보인다.

부브릴-숀버그 콤비가 선호하는 것처럼 극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연출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모습, 특히 사랑이라는 모습은 더 진실되고 안타까울 수 있기에 <라 트라비아타>의 성공 예와 같이 원작은 뮤지컬로 제작하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2시간여의 공연 내내 그리고 막이 내린 후 극장 문을 나오면서도 한가지 의문점이 끊임없이 생겼다. ‘왜 이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에 내가 감동 받지 못했을까?’라는 것이다. 프랑스 역사에 무지한 내가 팡틴의 죽음에 안타까워 했고,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죽어가는 킴의 모습에 너무나도 슬퍼했던 자신이 말이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 전개와 현실과의 개연성 부족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스토리의 전개가 너무나도 평범하게 흘러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관객들을 몰입하게 할 어떠한 극적인 무대적 장치 없이 <라 트라비아타>와 <물랑 루즈>에 이미 노출된 관객에게 있어서 이 러브 스토리는 새로울 것이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니콜 키드만이 주연했던 영화 <물랑 루즈>도 <라 트라비아타

>에서 모티브를 많이 따왔다고 한다.)

세 주인공 아망역의 줄리안 오벤든, 마거릿의 루띠 헨셸, 오토역의 알렉산더 핸슨

더불어 세 주인공들의 모습을 뒷받침해 주어야 할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배경은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기엔 충분해 보여도 스토리 라인과 연결되는 정교함이 떨어져 보였고, 아망의 여동생 아넷(Annette), 아넷의 연인인 유대인이면서 나찌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에 연결되어있는 루시엥(Lucien) 그리고 그들의 친구 피에로(Pierrot)의 모습들은 하나의 캐릭터로서 각각 살아있지 못한 느낌이다. <레미제라블>의 경우 장발장과 자베르뿐 아니라 팡틴, 에포닌, 코젯, 마리우스, 테나르디에 부부에 이르기까지 각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이 살아있는 것과 비교할 때 <마거릿>의 세 주인공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소개나 묘사는 충분하지 않다.

많은 영화음악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 미셀 르그랑의 음악도 <China Doll>,<The Face I See>,<Intoxication>과 같은 몇몇 마거릿과 아망의 곡들을 빼고는 쉽게 기억하지 못할 조금은 어렵고도 지루한 느낌의 곡들이 많아 극의 전개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 느낌.

또한 전체가 유리느낌의 호화로운 저택을 연상시키는 디자이너 폴 브라운(Paul Brown)의 세트 디자인은 당시의 화려했던 파리 상류 사회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인 듯 했지만 굳이 여러 조명 빛들이 여기저기 반사되어 관객들의 극의 집중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어야 했는지 아쉬웠다. 

극을 살리는 여주인공 루띠 헨셸의 연기력
하지만 마거릿역의 루띠 헨셸(Ruthie Henshall)의 무르익은 연기는 스토리 전개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세계 정상급
의 뮤지컬 배우임을 입증해 주었다. 극의 대부분이 그녀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아망과 오토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의 모습과 극의 종반 프랑스 시민들로부터 나찌의 정부였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보복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에서 요구되는 육체적,정신적 집중력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또한 신뢰할만한 연기력과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듯한 그녀의 노래들은 모든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와 더불어 아망역의 줄리안 오벤든(Julian Ovenden) 역시 때로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청년의 감수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힘있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당찬 의지와 용감함을 보여주며 한 순간 사랑에 빠져버린 젊은 예술가의 다양한 면모를 확인케 해주었다.

비록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보이는 이번 공연이지만 부브릴-숀버그의 뮤지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세계적으로 뮤지컬이 공연예술로서 자리잡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자신들의 나라인 프랑스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세계에 프랑스 문화전도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한편으로는 부럽고 존경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한국적 문화 콘텐츠들이 세계 곳곳에서 인정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