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브로드웨이가 로저스 & 해머스타인 콤비를 정점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영국의 웨스트엔드는 점점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된다. 초기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길버트 & 설리번 콤비의 일명 사보이 오페라 시리즈나, 1930~40년대의 노엘 코워드(Noel Coward), 이보 노벨로(Ivor Novello)와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웨스트엔드에 건재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2차 세계 대전의 악영향으로 인한 약 25년간의 영국 뮤지컬사 정체현상(?)은 무척이나 아쉬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대적인 영국산 뮤지컬들의 부재 현상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며, 소위 메가뮤지컬(Megamusical)이라 불리는 영국산 뮤지컬들의 전세계적인 성공으로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이 미국인들의 희로애락의 삶을 주로 이야기했던 것에 비해 메가뮤지컬이라 불리는 1980년대 영국산 뮤지컬들은 실제로 영국인들의 삶이나 역사에 대해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작품들은 고양이들의 무도회(캣츠), 파리 오페라극장의 괴기한 음악 천재(오페라의 유령), 기차 경주(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베트남 전쟁(미스 사이공), 프랑스 소시민들의 억압된 삶(레미제라블) 등을 그리고 있을 뿐, 한때 전세계를 제패했던 유구한 역사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유수의 대작가들을 보유한 드라마(Drama)의 나라 영국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흔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왜 영국인들이 뮤지컬 <올리버!>를 아끼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영국 뮤지컬사의 암흑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큰 성공을 거두었던 이 작품은 여러가지 면에서 ‘정통 영국산 뮤지컬’이라 불릴 만 하기 때문이다.


1960년에 초연한 <올리버!>는 영국인들의 자랑인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작품은 영국왕실의 고귀한 삶이나 귀족들의 사치스런 고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서민들의 어렵고 힘든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더욱 친근하다. 또 작품의 작사, 작곡을 맡은 라이오넬 바트(Lionel Bart)의 곡들이, 한번 들으면 바로 흥얼댈 수 있을 만큼 듣기 쉬워 영국식 뮤직 홀(Music Hall), 판토마임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는 것도 이 작품이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이유로 꼽을 수 있겠다. 한마디로 뮤지컬 <올리버!>는 영국을 대표하는 순수 영국산 서민 뮤지컬인 것이다.

흥행 청신호 = 성공적인 공연?

그렇다면 1994년 샘 멘데스(Sam Mendes) 연출의 런던 팰러디엄 극장 프로덕션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 해, 올 초부터 로열 드루리 레인(Theatre Royal Drury Lane) 극장에서 공연중인 루퍼트 굴드(Rupert Goold) 연출의 리바이벌작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전 티켓 판매 가치만 1천5백만 파운드로 신기록을 달성했다는 뉴스나, 2천 석이 넘는 대극장의 2, 3개월 분의 티켓이 이미 매진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공연이 흥행성에 있어서 대단히 성공적이라는 의견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작품성 면에서는 아쉬운 부분들이 적지않게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의 마케팅의 승리, 상대적으로 실망스런 공연의 질로 요약할 수 있을까?

미스터 빈 로완 앳킨슨(Rowan Atkinson)의 영향력

불안한 연출력과 매끄럽지 못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흥행하고 있는 첫 번째 성공 요인으로 패긴(Fagin)역의 코미디언 로완 앳킨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우리에게는 미스터 빈(Mr. Bean) 시리즈로 친숙한 그의 코믹한 무대 존재감은 공연의 다른 모든 특징적인 것들을 희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 보였다. 이번 공연은 그냥 “로완 앳킨슨 쇼”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관객들은 이미 충분히 웃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앳킨슨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What?’이라는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는데 이미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깔깔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코미디언으로서 쌓아온 이미지에 기반한다. 즉 로완 앳킨슨의 패긴에는 다분히 미스터 빈의 잔상이 남아있다. 당연하다. 그것이 관객들이 바라는 것이니까. 예를 들면 그의 말투, 고무와 같이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안면 표정들, 몰래 감춰놓은 보석들을 의인화하여 대화하거나 테디 베어(!)를 다루는 장면 등은 모두가 전부터 보여 주었던 앳킨슨 특유의 코미디 기법들이다. (실제 무대에서 직접 보는 이 모든 코믹 설정들은 무척이나 유쾌하다.)

전문 뮤지컬 배우에 비하면 노래 실력은 떨어지겠지만 로완 앳킨슨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는 모든 약점들을 장점으로 만들어 버린다. 특히 공연 후반 패긴의 솔로곡 ‘Reviewing the Situation’을 부르는 로완의 연기는 한편의 코미디 작품으로 생각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커다란 존재감을 뒤집어 보면, 무대에 로완 앳킨슨이 있었지만 패긴은 볼 수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엉뚱하고 때로는 이기적이지만 악의없는 미스터 빈의 이미지는 탐욕스런 소매치기 악당인 패긴의 이미지를 많이 중화시킬 수 밖에 없다. 스타 캐스팅의 단점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낸시(Nancy)역으로 선택된 조디 프렌저(Jodie Prenger)

또한 이번 공연은 매킨토시 특유의 여러 마케팅 전략들이 일찍부터 흥행 성공의 분위기를 조성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그가 로이드 웨버와 기획한 BBC TV 오디션 프로그램 ‘I’d Do Anything’을 통해 낸시역과 3명의 어린 올리버를 발탁하는 10주간의 과정은 잠재적 관객인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른 웨스트엔드 제작자들의 질시와 부러움을 한번에 받으며 작년 상반기 커다란 이슈를 만들었던 이 여주인공 캐스팅 과정은 로완 앳킨슨의 캐스팅 소식과 함께 뮤지컬 팬들의 기대를 한껏 높여 놓았고 이런 사전 분위기 조성은 매킨토시가 제작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낸시역으로 최종 선택된 조디 프렌저가 사실은 매킨토시의 이상적인 낸시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두 명의 후보가 남은 마지막 결선에서 매킨토시와 로이드 웨버의 선택과는 달리 시청자들은 전화투표를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의 조디 프렌저를 선택한다.(당시 두 뮤지컬 전문가는 스타성이 보이는 아일랜드 출신의 제시 버클리를 낸시로 점찍었었다.) 이 사건(?)을 두고 국립극장의 예술 감독이자 매킨토시의 <미스 사이공>을 연출했던 닉 하이트너(Nick Hytner)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카메론 매킨토시에게 노(No)를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대중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의미한다”라고 아주 재미있는 언급을 하기도 하였다.

분명 조디 프렌저는 지금 손드하임의 <어 리틀 나잇 뮤직>(A Little Night Music)에서 열연하고 있는 제시 버클리에 비해서 스타성은 떨어져 보인다. 다소 통통한 몸매와 전직 카바레 가수로서의 그녀 이미지는, 노래를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무대에서 매튜 본의 안무와 사려 깊은 낸시의 연기를 동시에 소화해 내기는 힘들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만들었었다. 실제로 무대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이러한 염려가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나 보이는 듯 했다. 대표곡인 ‘Oom-Pah-Pah’나 ‘As Long As He Needs Me’에서 보여준 노래와 연기는 그녀의 그 동안의 노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지만 웨스트엔드 최고 여배우의 기량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그녀에게 더 호감을 가졌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가 가지고 있던 (뮤지컬과 일맥상통하는) 서민적인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 같다. 조디 프렌저의 낸시는 런던 뒷골목의 여느 아낙네처럼 약간은 거칠지만 또한 불쌍한 올리버를 동정할 만큼 정이 많은 이미지였다. 비록 아직은 덜 다듬어져 투박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정이 가는 낸시를 대중들은 원했던 것이 아닐까? 마치 꿈을 가진 평범한 소녀가 신데렐라가 되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고 싶은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분명히 연기나 안무에 있어서 아직은 다듬어지지 못했지만, 노력하는 그녀라면 언젠가는 주변의 우려를 잠재우고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타캐스팅에 가려진 작품성

작품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주제와 맞닿아 있다. 성직자,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도 사회 부조리에 감염되어버린 암울한 시대상황에 대한 날카롭고 통렬한 풍자가, 스타 캐스팅과 매끄럽지 못한 연출력으로 제대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점은 못내 아쉽다. 라이오넬 바트의 경쾌한 곡들로 인해 뮤지컬이 원작 소설에 비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아졌다고 해도, <올리버!>가 지금까지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의 주제가 관객들에게 쉽고 효과적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이러한 주제 의식을 조금은 간과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고, 사회적 모순과 부정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의 결여는 공연의 전체적인 인상을 무디게 만들어 긴박감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예를 들어 악의 커다란 축을 담당하는 빌 사익스역(Bill Sikes)의 번 고먼(Burn Gorman)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로완 앳킨슨과 조디 프렌저의 이름에 밀려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 점이나,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악역인 패긴역이 스타 캐스팅으로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듯한 인상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 와중에서도 아트풀 도저(Artful Dodger)역의 어린 로스 맥코맥(Ross Mccormack)의 기대 이상의 감칠맛 나는 연기와, 앤소니 워드(Anthonoy Ward)의 아이디어 넘치는 세트 디자인은 후한 점수를 줄 만 하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것이 관건

50여 년이 지난 작품이 아직도 웨스트엔드의 대형 극장에 선보여질 수 있다는 점, 드물게 영국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뮤지컬이라는 점, 그리고 주로 스크린을 통해 접했던 로완 앳킨슨 같은 스타의 연기를 무대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등은 정말로 웨스트엔드 관객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이 뮤지컬로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그 어떤 선행 조건보다도 우선, 작품이 관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려고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기본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아무리 화려한 공연도 관객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지 못할 테니까.

사진제공 : Tristram Ken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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