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여든 다섯. 지난 60여 년 간 혁신적인 행보로 현대 연극계의 중심에서 가장 굵고 강렬한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영국 연출가 피터 브룩(Peter Stephen Paul Brook).

‘빈 공간’(The Empty Space), ‘열린 문’(The Open Door)’ 등 연극학도들에게 바이블과도 같이 내리 보던 저서로만 국내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그의 작품이 드디어 한국 무대에 오른다. 오는 17일부터 20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11 그리고 12>는 2009년 11월 파리 초연을 마친 피터 브룩의 가장 최신작이기에, 지금 그가 무대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를 가장 잘 마주하게 될 것이다.

피터 브룩이 누구?
라트비아 출신의 러시아, 유태계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피터 브룩. 옥스퍼드대학 재학 시절 대학극회를 통해 1943년 <닥터 파우스트>로 연출가로서의 길을 시작한다.

20대 초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하우스의 상임감독으로 지명되어 오페라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와의 인연으로 셰익스피어의 많은 고전들을 그간의 정형성을 깨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피터 브룩
초기 그는 연극, 오페라 등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며, <한 여름 밤의 꿈>, <템페스트> 등 특히 RSC와 함께 창의적인 해석이 돋보인 고전작을 선보였다. 이후 연출가 찰스 마로위츠와 함께 결성한 잔혹연극그룹을 통해 음성과 신체 언어를 탐구하며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고찰하며 또 다른 혁신을 실천한다. 

영국에서 파리로 거주지를 옮긴 후 인습적인 언어를 버리고, 세계 각국의 배우들과 함께 보편적 언어와 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현재의 피터 브룩이다. 영국에서의 왕성한 활동을 뒤로 하고 파리로 이주한 그는 국제 연극 연구소(Centre International de Recherches Theatrales, CIRT)를 설립해 다국적 배우들과 함께 그간 탐구했던 연극의 사회적 의미를 넘어 인류학적인 영향에 대해서 탐구한다.

특히 서양의 문화와 표현 양식에서 탈피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화와 서사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무대화를 10년 간 준비, 1985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장장 9시간에 걸쳐 공연하기도 했다.

기원전 2천년 경 인도 바라타족의 전쟁사를 다루고 있는 <마하바라타>는 한 민족의 종교, 역사, 예술, 법규, 철학 등을 모두 아우르고 있으며, 특별한 장치가 없는 빈 원형 무대, 동양 악기, 사회자를 비롯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등장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점은 <11 그리고 12>와 비슷한 구조를 띈다.

<11 그리고 12>
아프리카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의 지도자 티에르노 보카의 생애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11 그리고 12>는 티에르노 보카의 제자이자 아프리카 작가인 아마도우 함파테 바의 책을 무대화 한 것이다.


11 이면 어떻고 12 라면 어떠랴
수피교 수도승들의 특별 기도문 ‘완벽의 진주’. 이를 11번 낭송하면 지도자가 축언을 해 주던 전통이 있었으나, 어느 날 11번의 낭송이 끝나도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아 다시 한번 낭송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12번 기도문을 낭송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안 다른 지역의 지도자가 낭송의 횟수를 11번으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내세우며 이들의 갈등은 시작된다.

기도문을 열 한 번 외우는 것과 열 두 번 외우는 것을 두고 라이벌 관계의 두 종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나 이는 곧 종교적인 문제에서 확장되어 당시 프랑스 식민지 사업이라는 정치적 목적과도 연결이 된다.

종교와 정치, 사상을 아우르는 디에르노 보카의 삶과 신념을 통해 현재 인류사에도 반복되고 있는 분쟁, 폭력, 관용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빈 무대 & 일본 전통 타악기
모래, 몇 개의 나무 기둥, 바닥에 깔린 카펫. 이것이 무대의 전부이다. “연출 효과를 버렸을 때 뭔가 더 큰 가치를 지닌 다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다”던 피터 브룩의 빈 무대이다.

빈 무대를 더욱 크게 울리는 것은 일본 연주자가 담당하는 전통 타악기의 음이다. 동양 악기들로 간소하게 구성된 라이브 음악이 텍스트와 상상력 모두에 힘을 싣는다.

다국적 배우 그리고 해설자
“우주 안의 모든 인종의 신체란 대개 비슷하다. 다른 점은 스타일과 문화적 영향이다”라고 말한 피터 브룩. <11 그리고 12>에서도 영국, 미국, 이스라엘, 스페인, 프랑스, 말리(아프리카) 출신의 7명의 배우들이 한 무대에 선다. 이중 한 배우는 해설자 역할도 동시에 맡으며, 해설자의 설명에 따라 극이 진행되면 선문답 같은 이들의 대화가 일종의 잠언집을 읽는 듯한 느낌도 갖게 한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LG아트센터 제공


[ⓒ 플레이DB www.play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