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뉴욕에서는 솔로노바 아트 페스티발 (soloNova Arts Festival)이 열렸다. 솔로노바 아트 페스티발은 제목 그대로 ‘솔로(Solo)’, 즉 모노드라마와 시각예술에 초점을 맞춘 1인 종합예술제로, 축제 기간 동안 연극, 디자인, 미술, 콘서트 그리고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이 소개된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이번 예술제에서는 뉴욕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한 사람의 한국인이 있었다. 출품작 <페이스(face)>를 직접 쓰고 연기한 배우 김혜리씨. 그녀를 만나 그녀의 모노드라마를 들어보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시작한 배우의 길
미국에서 배우의 길로 들어서기 전, 김혜리씨는 정치외교학도였다. 사회, 세상, 그리고 사람에 관심이 많았던 탓일까? 그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보고 느끼는 감정들을 자신의 몸으로 이야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세상 별 거 없다.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후회하지 않는 법”이라며 용기를 주신 아버지의 응원 덕분에 얼마 되지 않는 전세금을 빼서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가 졸업한 아이오와대 연극과로 편입한 게 12년 전의 일이다. 언어의 장벽때문에 힘들지 않았냐는 뻔한 질문에 그녀는 대답했다. “절박했어요.”

동양인 배우에게는 좁은 뉴욕 무대, 작품 창작으로 극복
콜롬비아 대학원 졸업 후,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직장비자로는 프로페셔널한 오디션을 볼 수가 없었다. 2004년에 드디어 미정부로부터 노동허가를 받았지만, 동양인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적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연기 욕심이 날만큼 좋은 배역은 턱없이 부족했다. 김혜리씨는 자신이 설 무대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대본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첫 작품은 2003년 뉴욕에서 열린 ‘미드타운 인터네셔널 페스티발’에 소개된 한국 이민 가족의 이야기인 <워킹 쓰루 더 나잇 (Walking Through the Night)>. 2000년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에서 출간한, 생존자들의 증언집을 읽고 쓰기 시작한 모노드라마 <페이스>가 그 두번째다.


- 이번 페스티발 출품작이기도 했던 <페이스>는 어떤 작품인가요?
<페이스>는 전쟁을 겪으며 변화하는 한 여성의 여섯 살, 열 네 살, 열 다섯, 열 여섯 살,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린 시적인 작품입니다. ‘얼굴’이라는 의미의 영단어 ‘face’가 ‘직시하다’라는 뜻의 동사도 되잖아요? 다들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나라와 일본의 문제면서 동시에 어디서든 전쟁이 나면 유린당하게 되는 여성인권, 전쟁의 숨은 피해자들에 대해 관객과 함께 직시하고 싶었어요.

- 관객들의 반응은?
우선 뛰어난 작품성으로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LA 폭동에 관한 모노드라마 <트와잇 라이트>의 연기지도를 맡으셨던 메리 콘웨이(Merry Conway)가 대본을 보더니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다며 연기지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조언을 해준 첫번째 관객이 돼주셨어요. <버자이나 모놀로그>로 잘 알려진 이브 안셀러가 만든 ‘V-Day’라는 단체에서도 작품을 보러 왔고, 이 작품을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어요. 뮤지컬 <렌트>의 오리지널 무대 디자인을 했었던 무대 디자이너 분도 다음 번에는 본인이 무대디자인을 맡겠다고 했구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통해서 미국 관객들이 모르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상황과 정신대 할머님들이 전쟁 중에 여성으로서 겪어야했던 고통과 그 고통을 넘어선 싸움에 대해 인간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무엇보다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여섯 살부터 현재의 모습까지 메이크업(분장)의 힘을 빌리지 않고 연기했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땠나요?
무엇보다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어요. 제가 전달하는 내용이 중요한 주제이니만큼,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매 순간 벌어지는 상황이 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최대한의 촛점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모노드라마는 배우가 혼자 무대에 있으니까, 배우의 움직임 하나 소리 하나가 관객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어요. ‘나이’를 연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인물이 꼭 해야만하는 얘기에 촛점을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에 물 흐르듯 옮겨 다닐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인물의 나이며 성격도 더 섬세하게 만들어 가는 거죠. 이번 공연이 저에게도 많이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메리 선생님의 도움도 아주 컸구요.

- 이 작품의 다음 무대는?
다음 단계는 작품과 잘 맞는 극장을 찾는 거겠죠.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는 없어요. 좋은 작품으로만 만들고 싶어요. 뉴욕에서 두 세달 정도 충분히 관객들에게 홍보하면서 공연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도 공연하면 좋겠지요.

8월, 다시 오롯이 배우로만 뉴욕 무대에서 연기
김혜리씨의 다음 무대는 오는 8월 뉴욕 씨어터 워크샵 극장에서 공연될 찰스 미(Charles Mee)의 <코니 아일랜드 에비뉴>다. 이번에는 배우로서 연기만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대본작업에 대한 계획을 묻자, 기억과 존재감에 대한 작품, 그리고 욕조와 두 남녀의 이야기를 구상 중이라고 한다. 욕조와 두 남녀의 이야기라 아이디어만 들어도 구미가 당긴다. 그러면서 김혜리씨는 조심스럽게 <더 캐츠 어브 미리키타니(The Cats of Mirikitani)>라는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에 보면 예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끊임없이 창작하지 않을 기회를 찾는다.’라는 말을 해요. 끊임없이 창작하는 게 얼마나 힘든 지를 얘기해주는 구절이에요. 하지만 창작하지 않으면 존재감을 잃게 되죠. 전 끊임없이 발전하고 좋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김혜리씨의 눈에서 나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먼저 나의 작은 눈에 비해 그녀의 눈은 다섯 배쯤 컸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그린 그림처럼, 그녀의 얼굴이 집으로 그녀의 눈이 창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주인 김혜리씨가 세상을 더 잘 내다보기 위해 반들반들 닦아온 깨끗한 창문 같았다. 그녀는 앞으로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을 어떻게 쓰고 연기하게 될지 몹시 궁금해진다.

김혜리
미국 연극 배우 협의회 회원
미국 텔레비전/영화 노조 회원
영미권 발성화 화술 지도자 협회 회원 (The Voice And Speech Teachers Association)
한국인 유일의 Linklater 발성법 교수 자격증 취득자
현재 NYU Tisch 연극학부 출강

작품경력
뉴욕- [Richard III], [The Winter's Tale], [All is Not by Melissa James Gibson], [Songs of Dragons Flying to Heaven by Young Jean Lee], [Walking Through the Night(극작 및 출연)], [자전거]
한국- [여름과 연기]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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