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보는 전훈 연출의 작품은 신선함을 주었다. 무대는 간단해 큰 변화는 없었지만 차이카에 같이 쓰일 것 같은 무대 세트가 검은 옷의 수도사에도 적절하게 잘 어울렸다. 길게 붙여놓은 나무들과 여기저기 나무가지들이 극 중 배경을 잘 살려낸 것 같다. 소설을 희곡으로 바꾼 작품이라 전훈 연출의 재치가 자신만의 언어로 잘 살아난 것 같다. 여러가지 작은 아이디어들이 자칫 단순할 수 있는 연극을 잘 살려주었다. 그날 주연을 한 한지용씨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고 마지막에 등장한 홍정인씨의 외모와 분위기가 정말 이국적이라 극의 집중도를 높였다. 이야기 구조 보다는 배우들의 연기가 흥미로운 연극이었다.

안톤체홉의 갈매기를 본 후, 그의 극에 심취해서 모든 안톤체홉의 극을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두번째가 검은 옷의 수의사였습니다. 배우들이 난해한 극의 내용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극이 다소 끊기는 듯한 느낌과 대사전달상 매끄럽지 못한 것이 극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것 같아 다소 아쉬웠습니다.

어찌되었건 계속 공연이 올라오는 안톤체홉의 극을 관람할 것입니다.

이 연극이 갈등을 말하는 방식은 감각적이다. 갈등을 이야기 전개의 흐름 속 곳곳에 방치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고조된 감정을 시간이 흐르면 곧 사라질 무엇으로 변형시킨다. 무엇보다도 음향이 인상 깊었다. 원작이 소설인 만큼 소설적 문어체를 적극 반영한 독백과 방백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연출에서 무대가 대사의 음악성과 운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만 열면 딸을 천시여기고 아들을 신처럼 대하는 식의 거의 문제적 발언에 가까운 대사만 하는 빼쏘쯔끼는 고아였던 주인공 꼬브린 박사의 의붓아버지격인 후견인이다.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이 인물은 박사뿐만 아니라 딸인 따샤에게도 정신적으로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자아적 인격에 가깝다.

아마도 소설로 봤다면 박사의 정신병의 원인을 시골에 살고 있는 후견인 뻬쏘쯔끼와 그의 딸이 만들어내는, 강압적으로 자기주장과 기대를 몰아붙이는 환경 때문이라고 인과관계를 추측하며 읽었을 것 같다. 어머니의 유전적인 영향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극에서 가급적 이 인과관계로 상황을 파악하지 않도록 노력한 것 같다고 생각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검은 옷의 수도사’의 존재 때문이다. 박사가 보는 환각인 수도사가 등장하면서 박사의 정신병은 누구의 영향도 아닌 단순히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아주 사적인 고뇌, 개인적인 비극에 머물게 된다.

체홉 단편소설의 묘미는 특히 쁘띠부르주아 남성의 욕망이나 권위의식을 희화화한다는 데 있다. 2부에서 유리잔에 담긴 뽀얀 우유를 들고 박사의 발작을 망연자실해하며 지켜보는 뻬쏘쯔끼의 모습이 그의 건강한(?) 정신 상태를 은유한다면 검은 옷의 수도사는 그로테스크한 등장부터 남성적 허세의 면목을 보여줄 기세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수도사는 박사가 천재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로 등장하지만, 애석하게도 수도사는 꼬브린 박사 자기 자신만 볼 수 있다.

희비극의 교차점에서 점점 쇠약해져가는 박사는 보편적인 평범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세뇌하지만, 수도사가 등장해서 박사의 자기세뇌를 번복한다. 완전히 망해버렸는데 끝까지 사그라지지 않는 유아독존의 자존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펼쳐진다.

따샤는 도시생활을 하면서부터 방백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따샤는 박사가 독백과 방백을 섞어 말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모스크바 대학 출신의 철학박사지만 심리학 교수인 꼬브린 박사와 결혼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이 이 연극이 여성의 허영을 보여주는 은밀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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