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하루 였습니다

정통 연극 좋은 하루 였습니다

지성인과 대중
그 사이의 묘한 경계선

그 경계선을 비웃듯 짓뭉개고
그럼에도 숭고한 시를 따뜻한 조명 아래로
끄집어내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부부가
세상안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깨어져 나오는 것

좋았어요.

톡득하고 재밌었어요

극이 막을 내린 지 이미 며칠이나 흘렀지만... 너무 인상 깊게 봐서
기록 겸 남깁니다.


일단 극 내용 외적인 것만 말해보자면
극 초반에 와인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래서 그런지 자꾸 달큰한 포도쥬스향이 났습니다 ㅋㅋㅋ



캐스팅은 서지유 박호산 이종윤 님이었는데
딱 제가 생각했던 배역에 들어 맞는 느낌...

효석 역에 박호산님은 진짜 지적이지만 나약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이미지에 어울렸고

서지유님과 함께 대학생때 만나 같이 기타 치며 시를 읊는... 궁핍한, 그러나 그림으로 그린듯한 아름다운 지식인 부부를 잘 보여줬습니다.

소영 역의 서지유님은 처음에 보면서 참 예쁘고 청순하다.. 고 생각했었는데 후반부에 악에 받친 연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오동탁 역 이종윤님은 무식하지만 순수하고 넉살 좋은. 말 그대로 딱 ''돌쇠'' ㅋㅋㅋ 이 분 연기에 많이 웃었던 것 같습니다.



극의 초반부는 같이 와인을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칭찬도 해주는... 참 사이좋은 이웃의 모습으로 즐거운듯 가볍게 흘러갑니다.

효석이 포르노를 보다가 꿈을 꾸는데, 무슨 포르노의 신(?) 이 나타나서 갑자기 효석에게 그곳을 떼어주며 포르노의 길을 걸으라고....ㅋㅋㅋ

뜬금없는 개그포인트에 정말 뿜었습니다...ㅋㅋㅋㅋ 그 외에도 되게 진지한 장면인데 이혼법정에서 ''신구어딨어! 신구불러와! 2주후에 봅시다 해!!'' 라고 한다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정말 국어책 읽는 것 마냥 들린다거나..

진지한 극인 와중에 군데군데 웃긴 요소가 있어서 그렇게 무겁거나 쳐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목인 ''변태''는 여러가지로 해석 될 수 있으며, 극에 성적인 묘사가 등장하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저는 이 극의 초점은 결코 성적인 의미로서의 ''변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변태가 효석을 가리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변태인 것은 포르노를 봐서 따위가 아닙니다.


명사

1 . 본래의 형태가 변하여 달라짐. 또는 그런 상태. ‘탈바꿈’으로 순화.
2 . 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 또는 그 상태.
3 . <동물> 성체와는 형태, 생리, 생태가 전혀 다른 유생의 시기를 거치는 동물이 유생에서 성체로 변함. 또는 그런 과정. [비슷한 말] 탈바꿈.&#8226;비단 송충이뿐 아니라 곤충이란 것은 모두 그렇게 변태를 거쳐서 자라난다는 거지요. 출처 : 이기영, 신개지
4 . <식물> 식물의 뿌리, 줄기, 잎 따위의 기관이 본래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변하여 그 상태로 종(種)으로서 고정되는 일. 이러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줄기에는 가시ㆍ덩굴손ㆍ배반 따위가 있고, 뿌리에는 숨 뿌리ㆍ저장뿌리ㆍ공기뿌리 따위가 있으며, 잎에는 잎바늘ㆍ벌레잡이잎 따위가 있다.
5 . <심리> 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 또는 그 성욕을 가졌거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


변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면 위와 같은데,
이중에서 오히려 5번만 빼고 모든 의미가 극에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1번과 2번은 효석을 가리킵니다. ''변태''하지 못하는 효석. 그리고 ''변태''인 효석.
아내인 소영은 효석을 ''이티''라고 칭합니다. 화성에서 온 이티.



‘별만 쫓는
별만 치는
별만 안는
별만 먹는
이티야

별사탕은 안되겠니?’

그만큼 효석은 이상만을 꿈꾸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질적인 존재. 현실에 순응해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선, 아내 소영의 입장에선 ‘변태’라 칭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아내인 소영인 이러한 ‘변태’인 효석이 정상인으로 ‘변태’하기를 소망하는데, 이는 동탁에게 막노동을 소개시켜달라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깨끗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죽고 싶나 봐요.’


그러나 효석은 자신만의 안락한 누에고치인 지하책방에서 웅크린 채, 현실을 외면하며 끝끝내 변화하지 못하죠.

3,4번째는 바로 변태한 동탁을 가리킵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으나 무식하기 그지없었던 그는 효석에게 시를 배우는 취미 시인을 거쳐 등단까지 하게 되고

마침내 문학회의 간부까지 이르게 되죠. 아예 다른 존재가 된 듯 극단적인 변화, 마치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듯 변태한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변태’라는 자극적인 제목과

극 소개에 들어가 있는 도발적인 내용의 ‘지금은 자위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 라는 시.
연령제한과 더불어 선정적인 내용이 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원인이었지만
극의 한가운데 등장한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를 만지기보다 나를 만지기에 좋다.
팔을 뻗쳐 봐 손을 끌어당기는 곳이 있지

미끄럽게 일그러뜨려지는,
경련하며 물이 나는 장식하지 않겠다
자세를 바꿔서 나는 깊이 확장된다
나를 후비기 쉽게 손가락엔 어떤 반지도 끼우지 않는거다
고립을 즐기라고 스스로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팔은 두께와 결과 길이까지 적당하다.

-김이듬, 지금은 자위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


자위라는 것은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결국 성적인 의도의 유무만 다를 뿐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행위.


효석은 포르노를 봅니다.
포르노를 보는 것은 자위를 하기 위함입니다.

저 시가 등장하는 장면은
소영이 술에 취해 효석을 성적으로 갈구할 때입니다.
하지만 야한 언어유희만 할 뿐, 효석은 혼자서 해결하라고 하죠
소영은 집에 가서 ‘진짜’로 하자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실제로 행동하고, 현실 밖으로 나와 변화하기를 원하지만
남편은 그저 한낱 언어유희뿐, 책에, 시에 둘러싸여 말장난 뿐. 아내의 바람을, 현실을 외면한 채 자기 위로만 하고 있는 거죠.

결국 효석이 시를 읽는 것은, 쓰는 것은
자위를 하기 위함인 겁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를, 관념덩어리인 시와도 같은 가벼운 그 무게를 견딜 수가 없어서.

극 초반에 그는 아내와 동탁 앞에서 숭고하게 말합니다.

시는 한낱 관념덩어리가 아니라 잠들어 있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핵폭탄이요,
그렇기에 자신은 역사 속 인간의 삶을 흐르게 하는 숭고한 사명을 가진 고매한 지식인이라고.



그러나 현실은,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자위하고 있을 뿐인 것.
그렇게 자위의 수단으로써 그가 써내는 시는 한낱 관념덩어리만도 못한 저질 포르노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비록 속물적일지라도 치열한 삶 속에서 살아가는
동탁의 시를 이기지 못하고 대중들에게 외면 받았던 것이죠.





반면 그가 비웃던 동탁은 단숨에 등단해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지.
효석은 실제로 무능하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홍익3동 최강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동탁에 비해
열등하기까지 하죠.



그런 그가 가져야 했던 감정은
무능함과 무기력함이 아니라
바로 ‘열등감’이었습니다.

적절하면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열등감.


그러나 효석은
그 열등감이 열등감이라는 걸, 그가 동탁에게 느끼는 감정이 경멸이 아닌 질투라는 걸 깨닫는데 조차 한참이 걸리는 인간이었던 겁니다.


아내인 소영이
동탁이 올 때마다 타주던 커피가 있어.

한 번은 ‘킬리만자로의 푸른밤’
또 한 번은 ‘히말라야의 -’

동탁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졌냐고 묻자, 소영은 둘 다 원산지는 브라질이라고 하죠.
결국 원산지는 같고, 이름 붙이기 나름인 것을.
몰랐던 거죠

동탁이 쓴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시나
효석이 쓴 고상하고 어려운 시나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듯 달라진다는 사실을.

소영은 이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습니다. 현실에 타협 한 게 더 맞겠죠.

현실에 순응하려고 발버둥 쳐보려는 그녀에게 동탁은 그야말로 홍익 3동 최강의 인간이자 효도르.

이겨보려 하지만, 감히 상대도 되지 않는,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 유일하게 마음속의 자부심이라 자위하던 ‘시’마저도 빼앗아간.



‘왜 다 퍼주는데 다 빼앗긴 기분이 들지’

소영은 그렇게 모든 것을 앗아간 최강의 인간을, 단 한순간만이라도 자신의 아래로, 이기고 부서뜨리고 싶었기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어쩌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기 스스로가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너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죠.

‘더, 아직 더해. 내 영혼은 그 정도로 부서지지 않으니까, 1kg보다 무거우니까’

‘밑 닦았다고’

아직도 그 미칠 듯 극단에 치달은 연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녀가 마지막에 문학회 회장으로써 출간해 성공을 거둔 ‘별모양얼룩’이라는 시집은
동탁과의 그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씻을 수 없이 스스로 남긴 흔적이라 볼 수도 있고
평생을 별만 쫓던 효석이 남기고 난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더 나아가, 남편과 함께 시를 읊었다고는 하나

그동안 특출난 재능을 보인 적 없던 소영이 갑자기 별안간 성공을 거둘 만큼 시를 잘 쓰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차라리 명색이 스승이자 문학회의 회장으로서(원래 이 자리에는 둘다 효석이 있어야 하는게 맞는 거겠죠)
구실이나 체면이 부족하니 동탁이 대신 써준 시를 출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를 썰며''를 자신에게만 출판해달라던, 그런 부탁을 했던 소영이었이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해적이 아니면 해적의 아내라도 되고 싶었다''

그녀는

고고한 호수의 돛단배이기 보단
노략질을 할 지언정 차라리 현실에 누구보다도 맞서는 해적이 되고 싶었던 거죠.

결과적으로 그녀는 해적까진 아니더라도, 해적의 아내 비스무리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월세도 낼 필요 없이
책사랑을 떠날 필요 없이 그대로 남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학회 회장으로서 고고히 시집을 출간하는.

그러나 바다를 누벼야 할 해적이 사막에 남은 꼴.

허울뿐인 그 자리에서

지식을 파는 자신이 다방의 얼굴마담과 다를게 없음을 느끼고 공허함을 느끼죠.


언뜻 보면 시와 문학에 대해 애기하는 뜬구름 잡는 극인것 같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이야기었던 것 같습니다.

효석과 소영의 이혼 장면에서
단 한마디로 15년간의 결혼 생활은 너무도 쉽게 끝나버립니다.

그간의 부부생활이나 갈등에 대한 이야기, 정말 이혼을 하겠냐는 재질문보다

''쌍방 위자료는 없습니다. 맞습니까?''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쌍방 위자료는 없습니다. 맞습니까?''

위자료에 대한 확인이 가장 강조된게 정말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했습니다.


1kg에 100원.

현실적인 동탁과
이상적인 효석을 의미하며 대립한다고 볼 수 있는 고기과 책.

둘 다 그람수를 재서 가격을 매길 수 있지만
그 가격은 천지차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 같습니다.


이미 막을 내린 극인데 한번밖에 못 봐서 참 아쉽습니다.
다음에 재연 한다면 꼭 다시 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