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마라의 결말을 보고 싶었는데 사드의 결말로 극이 완성된 공연을 관람했네요^^

지난 서울시극단의 마라사드 공연을 본 후,
이번 공연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을 마라/사드에 대한 고객의 지지율로 결정된다는 것
그날 공연은 사드의 지지율이 높았는데, 다른 공연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남명렬의 사드는 아름다웠으며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치는 가죽 허리띠는 매혹적이었다. <- 어이;;;

하지만 평소 내가 인식하고 있는 사드.
지식이 있는 귀족계급으로 혁명에 가담했다가
민중의 어리석음과 부르주아의 탐욕과 혁명의 변질을 견디지 못하고 의심과 회한에 휘둘리며
결국 자신에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인 육체의 욕망에 충실할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
사드 '후작'은 없었다.

남명렬의 사드는 그것이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랬던 그것이 아니라는 걸,
종국에는 변해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글로 쓰여졌던 이상을 버리지 못하여
지쳐버린, 외롭고 늙은 '지식계급'이었다.
그래서 그가 육체의 욕망과 고통, 성행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 옷처럼 내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그가 죽은 마라를 불러낸 이유는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민중을, 혁명을, 마라를 조소하는 웃음소리는 스스로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고
마침내 고개를 떨군 채 흔들리는 몸은 마치 통곡처럼 보였다.

믿지도 못하는 것을 차마 놓을 수도 없어 그 주변을 맴도는 지식인이란
뜨겁게 서글프고 슬픈 존재이다.


홍원기의 마라는 그가 스스로 혁명임을 선언할 때,
모두가 그를 떠받들고 결국은 실패할 호산나;;;를 부를 때,
마지막 국민공회의 연설을 할 때 조차
그저 초라하고 외로운 존재자이다.
카리스마가 없는 마라라는 것은 얼마나 우습게 보이는 허상인가.
그의 이름은 그 곳에 있으나 마라는 거기에 없었다.
어쩌면 그게 더 실제의 마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실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객석의 배치도
흰 색의 정신병원, 갇힌/뛰쳐나오는 그림자들, 나름 예뻐보이는 무대 전체도
어둠속으로 관객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리쪼이는 조명의 따가움도
노련한 배우들의 멋진 연기도
마지막 오 분의 결말, 아니 결말을 투표에 맡기는 연출에 묻혀버렸다.

객석 어딘가에서(방싯) 무대 위로 내던져진 투표용지는
마라, 사드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동의할 수 없어 선택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연출에 반대한다는 의사의 표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는 공연이었다는 건
기실 바이스의 희곡 자체가 가진 매력, 그 힘이리라

다소 어려운 이야기를 풀고 있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공연이다..
이번 공연은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무척 가까워 현장감이 더하고
관객이 동참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페터 봐이스의 원작 <마라, 사드>를 읽었을 때, "뜨거운 마라, 차가운 사드"였다.
극단적 혁명가 마라와 극단적 회의주의자 사드이니..


그러나, 이번 작품은 "고개떨구는 마라, 냉온이 함께 하는 사드"이다.
게다가, 극중극의 구분이 모호하다. 서사극의 효과가 없다.
그로 인해, 공감이 되지 않을 뿐더러, 뭘 말하고자 하는건지 정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는다.


사드가 나올 때 외에는 집중도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객석이 마주보고 있는 탓에, 집중이 되지 않을 때면 맞은편 객석을 훑어보게 되고, 상대편 관객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겸연쩍게 되는 좌석배치.
좌석을 그렇게 배치할거면, 극에 몰입하게 해주는 작품으로 확실하게 만들든지.


지난 봄, 서울시극단, 박근형연출로 세종M씨어터에 올려진 작품에서는 마라를 영웅적으로 그려냈다. 작품이 웅장하고, 군중심리를 잘 표현했으며, '선동'적이었다. 그 작품에서 마라의 연설을 듣고 있노라면, 몸 안의 피가 불끈 솟아오르고 두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연출의 이번 작품에서, 혁명가 마라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다. 혁명을 향해 피끓게 하는 투쟁의지가 전혀 샘솟지 않는다. 마라 스스로 회의하는 모습이 강하다. 더구나, 사드와 주고받으며 대화할 때는, 사드의 강한 눈초리와 의지에 압도되어(?) 눈을 내리깔고 고개까지 떨군다. 몇번씩이나.. (양쪽 끝에서 대화하는 이 두 배우의 연기를 놓치지 않고 보느라, 눈은 계속 양쪽으로 찢어져야만 했다. 내한공연의 무대와 자막을 동시에 볼 때처럼 말이다.)


사드는 회의주의자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냉소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위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번 작품에서 사드는 뜨겁다. 왜...?


결말이 두개이더라.
사드에게 표를 던지느냐, 마라에게 표를 던지느냐.
아마도 마라에게 표를 던지는 관객은 현시대에서도 여전히 공감이 되는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한 것 같고, 사드에게 표를 던지는 관객은 개인적인 가치관이거나 배우의 연기에 박수를 보낸 것일 듯하다.


이러한 시도는 좋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형식적이다. 관객의 (국민의, 그리고 혁명과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단순하게 표결처리한다, 짧은 시간에.
기왕 그런 시도를 한 것이라면, 관객을 거수기로 공연에 참가하게 하기보다는, 배려가 있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작품과 대부분의 배우들의 연기가 불확실하다.
페터 봐이스가 이 작품을 썼을 때, 그리고 수십년 동안 이 작품이 열렬한 반응을 얻으면서 무대에 올려질 때, 2009년 대한민국에서 두 번이나 무대에 오를 때.. 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했을까.
모호함으로는 아무것도 이끌어낼 수 없다. 치열하고 철저해도 실패하기 쉬운 게 혁명이고 변화일진대, 무대에 그러한 의미가 있는 작품을 올리고자 할 때는 분명해야 한다. 어떤 형식으로 표현하든지간에 말이다. 아쉽다.